비룡소 판타지 문학상

당선작

없음

심사위원: 김서정(아동문학평론가·번역가), 이지연(번역가·작가·편집자)


심사 경위

제1회 비룡소 판타지 문학상 심사 결과를 발표합니다.
지난 4월 30일 응모를 마감한 결과, 다양한 소재와 형식, 주제를 담은 44편의 응모작이 접수되었습니다.
심사위원으로는 김서정, 이지연 님을 위촉하여 예심을 진행하였고, 총 3편을 본심작으로 선정, 지난 6월 28일 본사에 모여 심사 회의를 진행하였습니다. 오랜 시간 논의가 오가고 심사숙고를 거쳤으나, 안타깝게도 수상작을 선정하지 못하였습니다.
관심을 가지고 응모해 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심사평

본심작

  • 「온실의 밤」
  • 「그믐섬의 비밀」
  • 「타임 글래디에이터」

비룡소 판타지 문학상에 응모된 대규모의 작품들을 읽는 일은 즐거운 모험이자 힘겨운 도전이었다. 우선 600매가 넘는 긴 이야기를 힘차게 써 내려간 투고자들의 필력에 경의를 표한다. 문학사에서 고전으로 불리는 작품들의 흔적과 새롭게 일어나고 있는 싱싱한 모티프들을 따라가면서 판타지란 무엇인지, 어떤 시대에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 삶을 그려내고 독자들과 교감하고 싶어 하는지를 감지하는 것도 귀중한 배움의 기회였다.
판소리처럼 흥겨운 말의 리듬에 우리 고유의 판타지 캐릭터들의 이야기를 유머와 함께 실어낸 작품에서부터 『헝거 게임』을 연상시키는 계급사회 안 투쟁의 이야기까지 다양한 소재와 주제를 다룬 작품들은 각각의 개성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었다. 이 가운데 마지막 집중 토론의 대상이 된 작품은 세 편이었다.
『타임 글래디에이터』는 세 편 중 아마도 가장 낮은 연령대 독자들을 염두에 둔 이야기일 것이다. 열세 살에 고아가 되어 독립을 꿈꾸며 힘겨운 현실을 헤쳐 나가는 여자 주인공이 자신이 ‘타임 글래디에이터’임을 자각하고 임무를 완수하려 애쓴다는 이야기는 지금 이 시대 중학생 아이들의 현실에 대한 비판과 함께 시간에 대한 엄중한 탐구를 펼치는 점이 돋보였다. 시간의 시작점, 시간을 팔며 좀비가 되어가는 인간들, 시간을 사들이며 인간을 노예로 부리는 세력, 그 사이에서 거간꾼 노릇을 하는 인간 등의 모티프가 흥미로웠다. 하지만 주인공 솔이의 현실 삶과 함께 날실 씨실 역할을 하며 이야기를 짜내야 하는 그 모티프들이 충분히 펼쳐지며 조직적으로 엮이지 못한다는 점이 아쉬움이었다.
『그믐섬의 비밀』은 시공간이 불명확한 그믐섬이라는 가상 무대에서 마녀와 마법사, 늑대 귀와 호랑이 앞발과 원숭이 꼬리 등의 표식이 몸에 생겨나는 아이들, 그런 아이를 고발하는 부모들, 강제노역에 동원되는 아이들, 빛을 내며 주인을 지키는 뱀돌이라는 도구 등 다채롭고 화려한 캐릭터와 모티프들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기본적인 갈등의 배경, 슈로네라는 인물이 왜 그런 악정을 펴는지에 대한 개연성이 부족하다. 제 힘이 없어 남의 마법을 빼앗아 쓰는 마법사가 외부세계의 물자(보리쌀)와 교환하기 위한 약을 만들려고 아이들을 지하에 가두고 일을 시킨다는 설정은 이 화려한 이야기의 무게를 떠받쳐주는 토대로는 약해 보인다.
『온실의 밤』은 ‘식물성 판타지’라고 이름 붙일 만한 보기 드문 세계를 펼친다. 쇠락한 탄광도시를 숲으로 만들어버리려는 세력과 맞서 식물원에서 ‘화도’를 수련하며 성장하는 주인공이 뚜렷하게 부각되는 이야기다. 탄탄한 문장력으로 눈에 환히 보이듯 펼쳐내는 시각적 이미지들이 큰 장점이었다. 그러나 그 탄탄하고 밀도 높은 묘사가 오히려 가독성을 떨어뜨리는 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인간의 착취로 피폐해져가는 자연이 인간에게 거대한 적대 세력으로 화한다는 설정은 최근 판타지 흐름에서 두드러진 특징으로 보이는데, 이 시대 판타지의 새로운 축으로 자리 잡기까지는 숙성의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해 보인다.
오랜 토론과 고민 끝에 결국은 당선작을 내지 못했다. 무거운 마음으로 투고자들에게 안타까움과 감사를 전한다.

김서정(아동문학평론가·번역가)

여러 작가께서 노작을 투고해 주셨음에도 당선작을 내지 못했다. 질 높은 투고작임에도 대상 독자에 적합하지 못한 경우가 있었고, 좋은 아이디어에 기반하였으나 좀 더 퇴고를 요하는 경우도 많았다. 어린이와 청소년 독자를 향한 글은 자칫 가르치는 어조가 되어 버리기도 쉬운데 이것이 지난 시대의 낡은 가치관과 합쳐지면 읽어 나갈 만한 흥미를 이끌어 내기 힘들다. 판타지 세계를 구축하고 설명하는 데서 이미 이 함정에 빠진 투고작이 상당수 있어 특히 안타까웠다. 독자 세대의 의제에 대한 존중 어린 접근이 필요하겠다.
그럼에도 본심에 오른 세 작품은 각각의 장점이 뚜렷했다.
이능배틀물에 속할 『온실의 밤』은 식물에 관련된 초능력 설정으로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 시각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다만 매우 장르적인 이야기 구조에 비하여 캐릭터가 약하고 서로 겉도는 점이 아쉬웠다.
『그믐섬의 비밀』은 어린이라는 신분에 대한 은유로 이야기를 풀어나간 점이 힘 있게 다가왔다. 아이들을 지켜 주는 신비한 아티팩트 ‘뱀돌’과 아이들만이 갖고 있어 착취의 대상이 되는 특수한 능력, 그리고 그 능력을 더욱 특별하고 확실하게 노출시킴으로써 탄압을 불러오는 ‘표식’의 설정이 흥미로웠다. 부모 역할을 하지 못하는 작중 부모들 대신에 유일하게 양식 있는 어른으로 기능하는 마녀의 존재나 수성(獸性)이 깃든 아이들의 특수 능력도 인상적이다. 그러나 전체 이야기에 추진력이 모자라, 다소 방만한 인물과 서사를 정리해 완성도를 높이면 좋겠다.
『타임 글래디에이터』는 적아(敵我) 구분이 확실하고 대립이 양식적인 장르 소설의 미덕을 가진 동시에, 적들과도 여전히 의미 있는 교섭과 타협이 이루어질 수 있는 세계관이 마음을 끌었다. 주인공을 학대하는 친척집과 서로 눈엣가시인 쌍둥이의 묘사에서 생겨나는 현실감은 그들을 ‘치워버릴’ 수 없다는 데서 오는 것일 거다. 아까운 점은 ‘다른 세계’나 ‘시간’을 팔고 사고 뺏고 뺏기는 것에 관한 중요한 설정에 명확함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독자가 게임의 규칙을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으면 인물의 위기나 기회에 더 몰입할 수 있을 것이다.
깊은 고민을 주고받으며 논의를 거쳤으나 최종 수상작을 선정하지 못하게 되어 아쉬운 마음이다. 참여해 주신 모든 작가들께 감사와 응원을 보낸다.

이지연(번역가·작가·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