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병, 그 후

시리즈 블루픽션 33 | 샤론 크리치 | 옮김 김영진
연령 12세 이상 | 출판사 비룡소 | 출간일 2009년 5월 15일 | 정가 17,000원
수상/추천 뉴베리상 외 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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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병은 지독하다. 비록 찰나일지라도, 고통의 늪에서 헤매고 있는 이에게 그것은 순간의 바람이 아닌 영원할 것만 같은 지옥이다. 그는 용서가 없고 공평하다. 빈민촌의 이부터 피라미드의 정점에 서 있는 자에 이르기까지, 일생 동안 그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전무후무하다. 앓고 난 뒤 자신을 돌아보며 성숙하게끔 해주는 피할 수 없는 통과의례. 열병의 다른 이름은 성장통이다.

자연과 가족의 따뜻한 품에 얼굴을 부비며 살아가는 열세 살 소녀 살라망카도 그 열병만은 피해갈 수 없었다. 안온했던 삶이 일그러지고, 수긍할 수 없는 상황이 목을 단단히 움켜쥔다. 한 순간에 바뀌어 버린 꿈같은 상황을 어린 소녀는 어떻게 견뎌낼 수 있었을까. 코끼리 무덤. 살라망카의 여행은 코끼리가 자신이 죽을 곳을 향해 찾아가는 그것과 같이, 엄마의 죽음이라는 생경한 불행을 인정하며 마냥 현실을 회피하려고만 하는 어린 자신을 그 곳에 묻기 위한 과정이었다. 열병을 치료하는 하나의 뜨거운 과정.

살라망카는 엄마의 부재라는 고통에 누군가가 그려놓은 선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따라가듯, 자신과 똑같이 행동하는 피비를 보며 얼마나 마음이 아렸을까. 제 과오와 결점을 보는 것은 괴롭다. 그것이 이젠 되돌릴 수 없는 일이라면 더더욱. 행동하고 있는 바로 그 찰나의 순간에는 누구나 제 몸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기 어렵다. 나의 눈이 타인의 눈으로 변해야 비로소 그 안에서 일그러진 진정한 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살라망카와 피비가 열병을 앓았다면, 그녀들의 엄마는 지독한 두통을 앓았다. 열병처럼 그 온도는 뜨겁지 않다 할지라도, 계속되는 헝클어진 고통이 마음속까지 찔러 버리는 두통. 이따금씩 찾아오는 그 잔잔한 고통에 남몰래 괴로워하던 그들은, 결국 도화선에 불이 붙자 저마다 치료를 위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청춘을 불태웠던 아름다운 이름은 서랍 안에 빛바랜 채 아이의 엄마로서, 한 남자의 아내로서 살아가는 틀에 박힌 꽉 막힌 삶. 그녀들의 집에는 내가 있지만 내가 없다. 내가 사라졌다는 것, 나를 잃어버렸다는 것. 그것은 여자를 넘어 한 인간으로서의 처절한 아픔이고 강렬한 슬픔이다. 자녀와 가정을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다만 자기 자신마저도 사랑하고 싶었을 뿐.

열병이라는 관문을 겪기 전, 우리들은 흔하디흔한 실수를 범한다. 사랑하는 이의 인생과 나의 인생을 한데 묶어 동일시하는 것. 부모님의 손을 잡고 영원히 한 길을 걸어갈 것이라 믿으며, 친구와 같은 것을 보고 같은 생각을 하려고 애쓰며 그를 소유하려 든다. ‘누구나 자신의 일정표가 있다.’ 인생에 같음과 영원함은 없다. 저마다의 인생은 다르기에 나와 그의 인생의 종착역이 같으리라는 법은 없으며, 빙판길을 손을 맞잡고 걸어가다가는 결국 둘 다 차가운 바닥에 미끄러지고 만다. 스쳐지나가는 나그네와 친구는 있다 해도 동반자는 없는 험악한 등산길. 살라망카와 피비는 그 끝이 보이지 않은 산행을 이제부터 오르게 되겠지.

지독한 열병은 끝났다. 불청객이 곁을 떠난 다음 남은 일은 오직 건강해지는 것 뿐. 내가 살라망카의 모카신을 신고 있다면 깨달음과 행복, 두 개의 달 위를 걷고 있을 테지. 소녀는 여자가 되었다. 좋구나,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