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눈과 마음을 가진 시인이야기.

연령 12세 이상 | 출판사 비룡소 | 출간일 2012년 2월 17일 | 정가 15,000원


강압적인 아버지와 따뜻한 새엄마와 같이 살았던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담겨있다.  잔잔한 이야기는 머릿속에 상상의 나래를 펴기에 충분했고, 중간 중간 삽화 또한 글을 읽고 그리는 이미지와 비슷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보기에 좋았다.

 모든 사물에 관심을 갖고 관찰하기 좋아하던 아이였던 네루다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져서 기분 좋게 읽을 수 있다.

초록잉크로 쓴 글을 더 좋아했다는 네루다. 

책도 희망의 색인 초록으로 활자는 프린트되었고, 자간의 간격이 넓어 공간이 많아 천천히 읽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듯하다.



작가는 파블로 네루다의 어린시절 사건들의 기초에서 작품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책에도 등장하는 담장 구멍을 통해 넘겨받은 양인형을 집에 불이 나서 잃어버리게 될 때까지 오랫동안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양을 받았던 그 상황을 기억하고 그일에 관해 어린시절과 시라는 에세이를 쓰기까지 했다고 하니 그에게 있어서 그 양 한 마리는 아주 위대한 사건중에 하나였을것이다.  “그 물물교환은 소중한 것을 깨우쳐 주었다. 그것은 모든 인류가 어떤식으로든 함께 라는 것이다. 언젠가 담장 곁에 솔방울을 놓아두었던 것처럼 그 후로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 감옥에 있거나, 사냥을 하거나, 홀로 있는 수많은 이들의 문 앞에 내 말들을 놓아 두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그의 유년시절이야기가 궁금하다면, 혹은 유명한 시인의 유년생활이 궁금한 사람들, 상상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꼭 읽어보면 좋겠다.

 빨리빨리에 익숙한 아이들이 천천히 읽히는 이 책의 묘미를 알아갈 때 쯤이면 한창 시끄러운 학교폭력 소리들은 조금 더 잠잠해지지 않을까?  

 

 

“비 때문에 지겨워서 다들 기분 전환할 거리가 필요했구나. 이 방안에서 오래 버텼다. 가자. 응접실에서 책을 읽어 줄게”

네프탈 리가 말했다.

“하, 하, 하지만 응접실에는 들어가면 아, 아, 안되잖아요.”

마마드레는 미소를 지으며 눈썹을 치켜 올렸다.

“오늘은 괜찮아.”

마마드레와 올란도 삼촌이 핫초콜릿을 만들 동안, 네프탈리와 로리타, 심지어 로돌포까지 킬킬대며 방에서 응접실로 담요를 끌고 갔다.

 곧 모두 담요 밑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따듯한 음료를 홀짝거렸다. 마마드레가 책을 한 권 집어 들고는 목청을 가다듬고 읽기 시작하자, 아이들은 요정과 공주들의 나라로 빠져들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로리타는 뒤집어썻던 이불을 벗어 던지고는 벌떡 일어나 응접실을 깡충대며 빙빙 돌았다.

“난 공주야! 공주라고!”

로돌포가 놀렸다.

“넌 전혀 공주처럼 안 보이는데.”

올란도 삼촌이 마마드레를 쳐다보았다.

“맞아, 그렇게는 안 보여, 우리가 솜씨 좀 발휘해 볼까?”

마마드레는 생긋 웃으며 의자에서 일어나 참나무 띠에 청동 장식이 달린 큼지막한 트렁크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무도 트렁크 속에 뭐가 들었는지 본 적이 없었다. 네프탈리가 형 쪽을 보자, 로돌포는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로리타는 기대에 가득 차서 손으로 입을 막고 있었다.

마마드레가 둥그렇게 굽은 묵직한 뚜껑을 들어 올렸다. 네프탈리는 곰팡이 슨 옷과 삼나무 냄새에 이끌려 더 바짝 다가갔다.

 마마드레는 고이 접은 드레스, 양모 외투, 털모자를 꺼내어 네프탈리에게 건네주었다.그러고는 더 깊숙한 곳에서 레이스 페티코트와 얇은 스카프를 찾아냈다. 로리타가 잽싸게 옷 위에 페티코트를 걸쳤다. 마마드레는 다시 뒤적거리더니 기타를 꺼냈다. 올란도 삼촌이 그것을 가져다 줄을 조이며 음을 맞추기 시작했다.

 마마드레는 정장용 모자를 찾아내 로돌포에게 주었다. 마마드레가 로리타의 스카프를 매어 주는 사이 네프탈리는 트렁크 쪽으로 다가갔다. 뚜껑너머로 엿보니 바닥에 공단 리본으로 묶은 편지와 엽서 꾸러미가 보였다. 얼마나 많은 낱말들이 그 안에 간직되어 있을까?

 네프탈리는 몸을 기울여, 손을 뻗어, 꾸러미를 잡았다. 그러고는 그만 트렁크 안으로 거꾸러지고 말았다.

마마드레가 몸을 홱 돌렸다.

“네프탈리!”

트렁크 밑바닥에서 목이 막힌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예요.”

올란도 삼촌이 네프탈리를 들어 올려 소파에 앉혔을 때도 그는 여전히 손에서 꾸러미를 놓지 않았다. 편지는 죄다 가장자리가 뜯긴 데다 봉투 입구는 밀랍으로 봉해진 하트 모양의 도장이 찍힌 상태였다. 맨 위의 편지에는 봉인에 ‘사랑’이라는 낱말이 적혀 있었다.

 마마드레는 네프탈리의 손에서 꾸러미를 빼앗아 안에 도로 넣고는 트렁크를 조심스럽게 닫았다.

“네프탈리, 뚜껑이 네 머리 위로 떨어졌으면 어쩔 뻔했니. 손 위에 떨어졌다든가. 게다가 뭐 때문에?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친척들한테서 온 낡은 편지와 카드 때문에 말이냐? 다시는 이 트렁크를 열어 보지 않겠다고 약속하렴!”

네프탈리는 아쉬운 눈길로 꾸러미를 쳐다 보았다.

“야,야,약속할게요.”

그때 올란도 삼촌이 기타를 가볍게 퉁겼다.

“네프탈리, 이리 와서 내 옆에 서 보렴. 파트너로서 어떻게 진행했으면 좋겠니?”

네프탈 리가 고개를 들었다.

“노,노,노래 말이에요?”

“정확히 말하자면 내 감정이지.”

삼촌은 한쪽 발을 의자 위에 올리고 기타를 무릎에 놓았다.

“로돌포, 우리를 위해 노래 한 곡 불러 주겠니? 우리 집안에서 너만큼 노래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잖냐.”

삼촌이 연주를 시작했다.

로돌포는 머뭇거리며 정말 불러도 괜찮은지 마마드레와 올란도 삼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여기 안 계시잖니, 로돌포. 나를 위해 한 곡 불러 다오.”

로돌포가 마마드레를 다시 돌아보았다.

마마드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중략.

네프탈리는 로돌포나 로리타가 이렇게 행복해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마마드레가 크게 웃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은 지가 언제인지도. 네프탈리는 이 들뜬 기분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며 달려가 식구들을 얼싸안았다.

 그러나 너무나도 빨리 마마드레의 몸이 굳어졌다. 마마드레는 한 손을 들고 한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다들 마마드레와 함께 귀를 기울인 채 말이 없었다. 과연 소리가 들려왔다. 희미한 기차기적 소리였다. 매일 몇 대의 기차가 테무코를 통과해 지나가든, 마마드레는 항상 아버지의 기차 소리를 가려냈다. 마마들에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네프탈리는 로돌포의 얼굴에서 생기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마마드레가 입을 열였다.

“걱정하지 말렴. 아직 기차가 가까이 오진 않았어. 자, 어서…….”

모두 서두르기 시작했다. 로돌포와 올란도 삼촌은 트렁크에 들어 있던 물건들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로리타는 컵과 컵 받침을 황급히 그러모았다. 하지만 손이 너무 떨려서 컵 하나를 바닥에 떨어뜨려 깨고 말았다. 로리타가 울기 시작했다.

네프탈리는 동생에게 달려갔다.

“괜찮아 로리타. 침실에 담요를 도로 가,가,갖다 놔. 깨진 건 내가 치울게.”

로리타가 눈을 크게 뜨고 코를 훌쩍였다.

“하지만, 하지만…….”

“아버지가 눈치채시면 내가 깨뜨렸다고 말씀드릴게.”

네프탈 리가 동생을 달랬다.

로리타는 소매로 눈물을 닦고 다정하게 웃음 지어보이고는 담요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 동안 마마드레는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준비에 qkQKt다. 부엌에서 식탁보를 찾아 식당에 가져다 놓고, 찬장에서 촛대를 꺼내 식탁 위에 놓았다. 마마드레는 주도면밀하고 질서있게 말 한다미 없이 냅킨을 접고 유리잔과 접시를 놓았다.

 네프탈리는 컵과 컵 받침을 닦은 다음 로돌포와 올란도 삼촌에게 달려가 여분의 의자를 식탁으로 옮기는 것을 도왔다. 벌써부터 자기를 똑바로 쳐다보며 질문을 던질 어른들이 드려웠다.

“의,의, 의자는 몇 개나 놓아요?”

마마드레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적어도 열두 개는 있어야 해. 아버지는 그만한 손님들을 집으로 데려오지 못하면 길거리에서 낯선 사람이라도 데리고 와서 자리를 다 채울 테니까. 머리 빗으렴. 손도 씻고 나는 가서 따듯한 엠파나다(밀가루 반죽 속에 고기나 야채를 넣고 구운 아르헨티나의 전통요리)랑 스테이크를 가져오마.”

네프탈리는 감자 파이와 양파를 잔뜩 얹은 스테이크를 생각만 해도 입안에 침이 가득 고였다. 그 음식들이 기차 기적 소리를 듣는 순간 자신을 덮쳐오는 기분을 채워 주기를 바랐다.

 네프탈리는 마마드레가 돌아서서 부엌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이제 마마드레의 얼굴은 핏기를 잃고 얼이 빠진 듯 보였다. 마마드레의 웃음과 반짝이던 눈망울과 발그스레하던 뺨은 어떻게 된 걸까? 마마드레는 그것들을 어디에다 묻어 버렸을까?

채 한 시간도 안 되어 아버지의 장화 소리가 마룻장을 쿵쿵 울렸다. 아버지의 큰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아버지 왔다!”

아버지는 기관사가 쓰는 호루라기를 불었다.

네프탈리, 로돌포, 로리타가 달려 나와 아버지 앞에 섰다. 아이들은 검사를 받기 위해 손을 쫙 펴서 내밀었다. 네프탈리의 손바닥은 있는 힘껏 박박 문지른 탓에 아직도 불그스레했다.

“이만하면 됐군.”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식당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문이 다시 열리더니 남자들이 집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철도 노동자, 가게 주인, 심지어 테무코에 하룻밤 들렀다가 초대를 받고 온 떠돌이 행상들까지 있었다.

아버지는 천장에서 술을 꺼내 따르고 모두에게 앉을 자리를 정해 주었다.-p62~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