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룡소] 여성인 내가 나로서 살게 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번호사 ‘이태영’

시리즈 새싹 인물전 52 | 공지희 | 그림 민은정
연령 8세 이상 | 출판사 비룡소 | 출간일 2013년 3월 6일 | 정가 8,500원

비룡소 새싹인물전 [이태영] 을 받아보고는,

‘희야가 언제 이렇게 커서 이런 인물전을 읽는 나이가 되었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여느 책과는 달리 비룡소 책들은 제가 더 찾아 읽게 되는데요,

[내맘대로 선생님 만들기] 도 그랬고…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육아서는 아니지만,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될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고 할까요?

 

두딸의 엄마로서, 또한 여성으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변호사 ‘이태영’ 의 인물전은 좀 다르게 다가오더군요.

 

 

 

 

 

우리가 어릴적에 읽던 그런 비범한, 훌륭한 업적을 세운 위대한 사람들의 위인전과는

참 다르게 느껴진 비룡소 새싹인물전 [이태영]

책을 다 읽고 나서 ‘추천사’ 를 보면서… 아 이런 관점으로 만들어진 책이라 달라구나 싶더라구요.

 

<새싹인물전> 은 하늘 위에서 빛나는 위인을 옆자리 짝꿍의 위치로 내려놓았다고 해요.

만화같은 일러스트로 일상의 이야기처럼 푼 <새싹인물전>

‘인간다움’ , ‘성취를 위한 과정’ 을 통해

나의 노력과 의지가 ‘의미있는 삶’ 을 만들어 갈 수 있음을 알려주는 <새싹인물전>

 

우리 아이들의 의미있는 삶을 위해~~~

비룡소 새싹인물전 [이태영] 이 거름이 되길 바라며 책을 읽어 나갔습니다.

 

 

 

 

 

 

 

아이에게도 책을 쓰신 분들의 생각이 전해 졌는지…

희야도 저처럼 한참을 책에 빠지더라구요

희야가 어떤 생각을 학 있을까 궁금하지만, 그 궁금증은 나중에 들어보기로 했답니다.

 

 

 

 

골마을 평안북도 운산에서 1914년 태어난 이태영

일본 식민지하에서 어려운 살림에도 태영의 부모님은 독립운동에 돈을 보탰습니다.

 

 

 

 

태영의 첫돌 무렵, 광산사고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 두아들과 태영을 기르게 되는데요,

 

일본 순사에게 ‘남의 땅에 와서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건 잘못이에요’ 라고

야무지고 당차게 말하기도 한 여섯살 꼬마 태영에게 큰오빠는

태영이 죄없는 사람이 억울하게 벌을 받지 않도록 하는 변호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죠.

이 때부터 변호사에 대한 태영의 꿈이 자라게 됩니다.

 

 

 

1919년, 광동 보통학교 때 ‘왜 아들을 낳으면 온 가족이 기뻐하고,

딸을 낳으면 엄마들이 우느 거지요?’ 하고 울며 호소하기도 했던 태영.

 

큰며느리로써의 부담감으로 아들을 낳고 싶었던 저 또한 고개가 숙여지는 장면이었어요.

저희 두딸도 이렇게 자기의 생각을 마음껏 표현하도록 해줘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구요.

 

 

 

 

‘공부해야할 아들은 자고, 공부안 해도 좋을 딸은 등잔불 기름이 닿도록 공부하네’ 라는

어머니의 말에 서운함을 이야기 하는 태영을, 어머닌 끝까지 노력했습니다.

 

 정의 여자 고등 보통학교를 일등으로 졸업하고, 광동 보통학교의 선생님이 되기도 했지만…

공부에 대한 열의로 1932년 이화 여자 전문학교 가사과 들어가

가사과에서 평소 관심이 있었던 여성문제 대해 공부를 합니다.

이듬해 학교에 볍률 수업에 생겨 법률을 공부하게 된 이태영는

‘책보따리를 두개 들고다니는 축지법 소녀’ 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바쁘게 가사공부, 법률공부를 합니다.

 

 

 

1936년 이회여자 전문학교을 일등으로 졸업하고 평양 여자 고등 성경학교의 선생님이 된 이태영은

독립운동과 옳은 일에 애쓰고, 태영의 꿈을 잘 이해해준 목사 정일형 만나 결혼을 합니다.

신학교 교수가 된 정일형은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꾸지 않고 일본을 반대해 감옥살이를 하게 되요.

 

 

 

 

남편을 대신해 누비이불 장사를 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1945년,

무죄로 정일형는 풀려나고 우리나라는 독립을 하게 됩니다.

 

첫 사법시험에서 떨어지고, 이태영은 1946년 서울 대학교 법과 대학 최초의 여학생이 됩니다.

그때 이태영의 나이 서른셋, 가정주부이자 아이 셋의 엄마였죠.

점심시간 막내딸을 젖 먹이며 공부한 태영은 1949년, 서울 대학교 법과 대학을 졸업합니다.

 

 

 

 

이태영의 시어머니, 남편, 아이들의 도움이 많이 컸다고 하는데요

정말 한사람이 역할을 하는데 있어 혼자할 수 있는 건 없는 거 같아요.

저도 그 가족들에게 정말 박수를 보냅니다.

 

 

 

 

1950년, 육이오 전쟁이 일어나고 부산 피란중에서

밤낮으로 공부에 매달려 이듬해에 최초로 사법시험에 합격을 합니다.

“가정부인으로서 사법 시험에 당당히 합격하여

우리나라 역사 이래 ‘처음’ 이라는 영예를 차지한 여성”

이라는 기사만 보더라도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느낄 수가 있네요.

하지만, 여자가 판사가 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로

판사, 검사 임명에서 제외된 이태영은 어릴 적 꿈대로 변호사가 되기로 합니다.

 

 

 

 

가난하고 배운 것이 없어, 여성이라는 이유로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는 여성들을 위해

1956년, 이태영은 여성법률상담소를 엽니다.

 

 

 

 

여성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는 불평등한 법을 이태영은

많은 사람들과 함께 힘을 모아 하나하나 고쳐 나갑니다.

가족법 개정으로 부부가 모은 재산은 부부 모두의 재산이 되었고,

이혼한 뒤에도 여성도 자식을 기를 수 있게 되었어요.

 

그후 미국으로 가서 공부를 하고 온 이태영은 많은 사람들을 설득해

1963년, 우리나라 최초의 가정 법원이 문을 열게 됩니다.

가족 사이의 문제에서 이제 여성과 어린이들이 보호 받게 되는거죠.

 

 

 

여성 법률 상담소를 통해 가난하고 고퉁받는 여성들에게

무료로 법률상담을 해 준 노력을 전세계적으로 인정받아

1975년, 동양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막사이사이상’ 을 받습니다.

이 상금으로 이태영은 ‘여성들을 위한, 여성들에 의한, 여성들 모두의 건물인 여성백회관’ 을 짓습니다.

 

 

 

 

 

 

 

 

통일이 되면 판문점에 이산가족 법률상담소를 세우겠다는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1998년 84세로 하늘나라로 떠난 이태영.

여성이 살기 힘든 땅에서 최초로 여성 변호사과 되어 불평등한 법을 고쳐

여성이 인간으로서 존중받으며 살 수 있게 만들어 준 분이십니다.

 

 

 

여성인 우리가 이땅에서 이렇게 ‘나로서’ 살 수 있게 해준 이태영 변호사님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