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의 꽃]-가끔은 햇살 가득한 날도 있지요

시리즈 블루픽션 73 | 정연철
연령 14세 이상 | 출판사 비룡소 | 출간일 2013년 12월 5일 | 정가 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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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사는 게 장애물달리기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 짧은 인생에도 폐타이어, 매트, 줄넘기, 간짓대 같은 장애물들이 곳곳에 널려 있다.

하지만 어떻게든 버티고 이겨내다 보면 뜻밖의 행운도 따른다.

대롱대롱 매달린 과자를 따 먹고, 달리기에서 2등을 먹기도 하고… (본문 161,162p)

 

흐느적거리는 몸, 개개풀린 눈, 풀풀 풍기는 술 냄새. 술주정뱅이의 전형. 아버지다. 이마에 땀이 흥건했고 베갯잇은 축축했다. 치 떨리는 악몽으로 기범은 일어났다. 마룻바닥에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진 것은 낫이었고, 마룻바닥에 선혈이 뚝뚝 떨어져 있었으며, 엄마는 문설주를 잡은 채 천천히 주저앉으며 흐느끼고 있었고, 기범 자신도 망연자실 엄마를 바라보며 그 자리에 털퍼덕 주저앉았다. 아버지는 이렇게 기범의 꿈속을 자유자재로 드나들었다. 아버지의 존재를 잊기 위해 수학 정석을 파고들고 영어 문장을 통째로 외운 탓에 아버지라는 세균을 퇴치한 듯 했는데, 아버지는 대학 입시를 하루 앞둔 날, 예고 없이 등장했다. 억눌려 있던 감정들이 되살아나면서 결국 기범은 2교시 수리 영역 시험을 치르던 중 시험장을 뛰쳐나왔고, 공든 탑은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그리고 기범은 치유 불가능한 상처들을 해결하기 위해 한때는 탈출하고 싶어 안달 났던, 아버지의 흔적들이 지천에 깔려 있는 고향행 버스에 승차했다.

 

 

터널같은 어둡고 불안했던 시간, 마법처럼 그 시간을 딛고 꽃을 피운, 어느 소년의 비밀스러운 성장 일기 <<마법의 꽃>>, 사춘기 딸을 둔 엄마이기에 성장 소설에 관심이 갔고, 책 제목에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그 이야기가 궁금해 서둘러 책을 펼쳤는데 첫 장부터 마음이 아프다.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발버둥쳤던 기범은 결국 아버지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던 모양이다. 가족이 있다는 건 태풍에도 꿈쩍 앉는 울타리가 있는 거라고 하지만, 기범이네 가족은 위태로운 듯 보인다. 아버지에 대한 기범의 분노, 연민, 고통, 슬픔이 느껴진다. 기범을 따라 나는 서둘러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 영순이만 남아 있는 고향으로 따라가보았다. 그곳에는 터널같이 어둡고 불안하기만 한 어린 기범이 있었다.

 

마을로 가는 길은 기범에게는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거슬러 가는 기분이었다. 3박 4일 수학여행 떠나보냈던 자식을 맞이하는 표정인 엄마는 오늘따라 더 왜소해 보였다. 기범은 중학교 1학년 때, 난생 처음 성적 우수 장학금을 받자 아버지가 선물한 책꽂이가 딸린 중고 책상을 보았다. 이제는 쓸모없는 책상을 들어냈을 때 기범은 책상다리를 받쳐 두었던 공책 한 권을 보게 되었다.

비밀 일기장 권기범.

첫 장을 넘겨자 누런 종이에는 꼭꼭 눌러 쓴 듯한 깨알 같은 글씨로 빽백하게 하소연이 적혀 있었고, 기범은 가리가리 찢어졌던 기억의 파편들이 테트리스 게임의 테트로미노처럼 재결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이야기는 기범의 일기와 함께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기범에게로 옮겨졌다. 기범은 아버지와 정면승부를 벌이기 위해서 천천히 일기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먹구름주의보 발령 상태인 집, 아버지에 대한 공포와 중오가 뼈와 살과 키는 물론 영혼마저 갉아먹고 있었다. 늘 술에 절어있는 아버지는 엄마와 자식들을 때리곤 했고, 그런 탓에 기범은 집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기범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늘 상처만 남기고 휭 떠나가는 얄미운 태풍과도 같았다. 술에 취해 집으로 자주 태풍을 몰고 왔고, 술이 깨고 태풍이 가라앉으면 때려 부순 물건들만 고치고 상처 받은 자식들의 마음은 그냥 내버려 두곤 했으니 말이다. 기범의 일기장에는 아버지에 대한 슬픈 기억, 아버지로 인해 상처 받은 기억, 그리고 가난 때문에 힘겨웠던 기억이 많았다. 

 

만날 재미있고 만날 기뻐서 웃는다면, 행복도 얼마나 시시하고 지겹겠는가? 그래서 난 내 마음이 어둠으로 꽉 차기 전에, 가끔은 오늘같이 햇살 가득한 날을 선물로 받는다면 크게 욕심 부리지 않을 작정이었다. 아버지가 가끔 변해서 집 안 구석구석에 웃음꽃이 주렁주렁 달리면, 행복도 얼마나 값진 줄 알게 될 테니까. (본문 117p)

 

다행히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에 홧홧 달아오르다가도 아궁이 속에서 구워낸 노란 군고구마 하나 가지고도 금세 식어 버리곤 한 탓에 기범은 아버지와 가난이라는 거대한 먹구름 층을 버텨 내고 있었다. 무엇보다 터널같이 어둡고 불안했던 그 시간에는 기범이가 기억하지 못했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 즐거웠던 유년의 기억들이 일기장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자신을 감싸안았던 아버지에게서 느꼈던 따뜻함, 위기에서 구해주었던 아버지의 무모함, 함께 다슬기를 먹으며 영순이를 놀려먹다가 허허 웃기도 하던 아버지, 자신과 다르지 않았던 아버지의 슬픈 과거에 대한 동정심, 아픈 아버지를 위해 산 국화빵을 가슴속에 품고 왔던 기억들…그 기억들은 기범의 가슴에 많은 흔적을 남긴 아버지로 인해 가려져 있었고, 기범은 일기장을 통해 그렇게 즐겁고 행복했던, 때로는 아버지가 좋다(?)고 착각했던 날들도 있음을 알게 된다. 그 기억들은 상처가 곪다가 터져 피 칠갑이 되었지만 꿰매도 덮어 두기만 했기에 낫지 않았던 돌곰겼던 상처를 터뜨려주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일기장에서 이 죽일 놈의 방황에 대한 정답이 있음을 알게 된다. 수많은 장애물을 통과왔으니 이제 과자를 먹고 싶다고. 그는 방전될 위기에 처했던 삶의 배터리가 충전되는 것 같았다. 기범의 삶처럼 우리도 수많은 장애물을 넘고 있다. 간혹 과자를 먹으며 생각지도 못한 2등을 하기도 했을 것이다. 물론 앞으로도 먹구름주의보는 계속 발령과 해제를 반복할 것이며, 장애물 앞에 놓이게 되는 날은 무수히 많을 것이다. 기범은 고향에서 망각하고 있었던 시간을 되찾았다.

 

튀밥꽃 피는 시간. 이제 다시는 그 시간의 끄나풀을 놓치지 않을 거다. 필요할 때 언제든 끄집어내 꽃을 활짝 피울 거다. 그 마법이 꽃을. (본문 229p)

 

상처를 아물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고통의 시간과 대면하는 일이라고들 한다. 기범은 아버지와의 정면대결을 통해 아버지에게 받았던 상처만을 기억했던 어린시절에서 행복했고 즐거웠고 한편으로는 기억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다른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렇게 기범의 시간을 쫓다보니 나 역시도 과거의 암울했던 기억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어쩌면 내가 놓치고 있는 행복하고 즐거웠던 시간이 있으리라. 그리고 앞으로 수많은 장애물 앞에 놓이게 될 우리의 삶에 기범이 보여준 용기는 마법이 꽃이라는 달콤한 희망을 선물해주었다. 이제 고등학생이 되는 딸아이, 수능이라는 긴 터널 앞에 놓이게 되었다. 그런 딸에게 터널같이 어둡고 불안했던 시간을 딛고 꽃을 피운 기범의 성장 일기를 보여주련다. 버티고 이겨내다보면 장애물 저편에 놓은 맛있는 과자가 놓여있음을 깨닫게 되리라.

 

때로는 유쾌하게, 때로는 마음 아프게, 때로는 잔잔한 감동으로 전하는 기범의 이야기 <<마법의 꽃>> 그 성장이 너무도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사진출처: ‘마법의 꽃’ 표지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