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작가: 삶에서 우러나온 소박한 글을 꿈꿔요 - 김미혜 작가

달빛이 휘영청 밝은 대보름 밤, 오곡밥을 훔쳐 먹으러 다녔던 적 있나요? 동지팥죽을 장독대, 헛간에 갖다 놓았던 적은요? 까만 하늘에 뽀얗게 흘러가는 은하수를 보며 옥황상제를 원망한 적은? 제가 어렸을 적에 우리 마을에 사는 아이들은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명절을 한껏 즐기고 살았답니다. 그 추억에 정보를 더해 만든 이야기가 알콩달콩 명절 이야기지요. 빡빡한 생활 가운데서도 삶을 즐길 줄 알았던 우리 조상들의 흥에 매료되어 신나게 글을 썼는데요, 두 권의 명절 원고를 계약할 때만 해도 시리즈로 이어서 낼 생각은 하진 않았어요. 그런데, 계속 써도 좋다고 하셔서 너무 기뻤죠.
CC-TV가 지키는 아파트에서 사는 우리, 쌀을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명절의 의미는 퇴색될 수밖에 없지요. 하지만 우리 조상들의 여유와 멋까진 잃지 말았으면 해요. 어쩌면 지금 이 시대에 더 필요한 것이 일하고 공부하는 사이, 틈을 즐길 줄 아는 지혜와 흥이 아닐까 싶어요. 짬짬이 놀기, 짬짬이 먹기, 짬짬이 기도하기……. 그것을 명절 이야기를 통해 느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저는 딱딱한 걸 좋아하지 않아요. 정보를 전하는 책이지만 아기자기한 상상력을 더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야기를 보다 부드럽게 끌고 갈 수 있는 캐릭터를 찾았지요. 명절에서 빠질 수 없는 존재,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데도 무리가 없는 캐릭터를 만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어요. 동짓날에 귀신, 칠석날에 까막까치, 정월 대보름에 개. 이미 명절 속에서 살아 있는 존재잖아요. 그들을 이야기로 모시고 오면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명절 이야기를 풀기에 그들은 딱! 좋았지요.

 

글쎄, 잠자리를 보고 기겁을 하는 아이가 있더군요. 뚱그런 두 눈이 무섭다는 거예요. 싫어하는 게 아니라 무섭다고?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어요. 잠자리가 왜 무서울까요? 너무 낯설기 때문이겠지요. 낯선 것은 두렵거든요. 자연을 접할 기회가 얼마나 없었으면 잠자리를 보곤 질색할까요. 사랑하라, 아껴라, 말하는 것보다 자주 만날 수 있게 해 주면 좋겠어요.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되게요. 직접 만날 수 없다면 자연 이야기를 많이 읽게 해 주세요. 도감을 보고 그림책을 읽는다면 친숙해지니까요. 『깜장 콩벌레』를 읽고 콩벌레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아이들이 있었어요. 하나를 좋아하게 되면 또 다른 하나를 알고 싶어지지요. 작은 벌레 하나를 사랑할 줄 아는 아이는 다른 생명까지 사랑하게 될 거예요.

저는 몹시 단순해요. 애 같을 때가 많죠. 이런 저런 글을 쓰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풀어내기에 가장 적합한 도구가 무엇인지 알았어요. 어린이문학이었지요. 기쁨이나 슬픔이 넘칠 때에 그 감정을 무엇엔가 담아내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게 어린이들이 읽으면 좋을 글이었던 거예요.
두 번째 동시집 『아빠를 딱 하루만』을 쓸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천진무구한 아이가 읊조린 맑은 시어가 가득하다는 첫 동시집 『아기 까치의 우산』을 쓸 때도 견디기 힘든 날이 많았어요. 명절 이야기를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런데 현실 속의 나와 전혀 다른 어조로 글을 쓰고 있노라면 슬픔의 무게가 새털처럼 가벼워지더군요. 기쁨이든 슬픔이든 밝음이든 어둠이든 아이들이 읽을 글로 바꾸는 과정은 정말 행복한 일이에요.

4학년쯤이었나 봐요. 아버지께서 세계 명작 전집을 한 질 사오셨어요. 시골에 사는 저에게 세계 명작 전집은 다른 세상을 보여 주는 창이었어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세상이 책 속에 있더군요. 놀라웠죠. 그중 가장 재미있게 읽은 이야기가 『플랜더스의 개』예요. 파트라슈와 네로의 비극적 운명이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베개를 흠뻑 적시곤 했어요. 다시 읽을 때마다 그 선량한 주인공들이 제발 죽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결말이 달라지길 간절히 바랐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요.
요즘 감명 깊게 읽은 책은 『칠기 공주』예요. 권력을 휘두르는 폭군에게 굴하지 않고 고통 받는 백성들의 삶을 칠기에 담아내는 공주 이야기이지요. 감옥에 갇혀서도 신음하는 민중의 삶을 그려내는 『칠기 공주』. 정말 멋진 작품입니다. 역사와 사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 저항 정신을 가진 사람, 정의로운 사람은 언제나 큰 감동을 주지요.

글 작업은 마친 지 오래 되었고 지금은 그림 작업 중인 책들이 여러 권 있어요. 명절 이야기가 이어서 나올 거고, 동시를 활용한 경복궁 이야기와 우리 옷 이야기가 조만간 나올 거예요. 도서관에서 아이들과 동시를 읽으며 즐겼던 시간을 정리하여 동시와 노는 방법을 보여 주는 책도 준비하고 있고요. 삶에서 우러나온 글, 기교에 기대지 않은 글, 소박한 글, 정의와 지성을 바탕으로 하지만 서정성 강한 글, 동심의 세계를 감동과 재미로 그려낸 글……. 이런 글들을 쓰고 싶어요. 그런데 제 삶이 달라져야만 나올 수 있는 글이겠지요. 어떤 책을 쓰고 싶단 생각보단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고민하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