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렇게 힘이 들까요?
왜 이렇게 아파해야 할까요?
왜 이렇게 맘대로 되지 않을까요?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요?
왜?
왜일까요?
청소년 소설 속 인물들을 만나고 나면
내가 그들이라면 꼭 한번은 묻고 싶은 질문들이다.
조우리 작가의 『어쨌거나 스무 살은 되고 싶지 않아』 는, 조금 새롭게 인물들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듯이 시작하는데, 어느 순간 인물들이 서로 얽혀있고, 서로 관계맺음이 되어 있으며, 서로를 위로하고 안아준다. 한 공간 속에 함께 하는 인물들을 마치 다른 세계 속의 인물처럼 시작했다가 하나로 모여지는 응집력을 가진 이야기 『어쨌거나 스무 살은 되고 싶지 않아』 를 만나본다.
이재경
김하연
이수영
천현준
연보라
최민기
서로가 다른 힘겨움으로 십대를 지켜내고 있는 6명의 아이들. 고작 열일곱 열여덟인 그들의 겪어나가는 세상을 들여다보면 뭐가 이렇게? 라는 의문이 먼저 든다. 왜 그들이 그렇게 힘에 겨워하는지, 왜 아무도 몰라주었을까 하는 답답함에 깊은 숨이 쉬어지다가도 순간, 부모의 자리가 어디까지 인지를 들여다보게 된다.
좋아해서, 그게 잠깐의 불장난일지라도 그순간은 진실이었는데 그 결과로 엄마라는 새로운 이름이 생긴 하연이는, 시도때도없이 울어버리는 아기가 원망스럽고, 아기를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하연이 동생으로 호적에 올린 엄마도 원망스럽다. 그리고 가장 원망스러운 건 하연이 자신이다. 세상에서 외떨어진 것만 같은 쓸쓸함을 배워가는 하연이는 자신을 바라보는 재경이의 눈빛도 부담스럽다. 재경이에게 일어난 신체 변화에도 하연이는 무감각할 뿐이다. 재경이의 빨갛게 물들어가는 얼굴의 변화를 지켜볼 만큼 친구들 앞에서 자신의 처지가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재경이는 설명할 수 없는 자신의 감정과 신체의 변화 사이에서 외롭게 싸운다. 재경이 앞에 나타난 부모님은 일을 부풀리고 부풀려 사건을 크게 만들고 더이상 학교에서 버틸 힘이 사라진 재경은 자퇴라는 최후의 선택을 내리게 된다.
친구와 하룻밤의 즐거움에 도취된 수영이, 항상 외로웠단 수영이에게 보라는 자유와 벗어남의 탈출구를 만들어준다. 그러나 그 탈출구가 때로는 들여놓지 말아야 하는 또다른 세계의 입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수영이는 보라를 데리고 뛰쳐나온다. 탈출했다는 안도감은 잠시 수영과 보라는 선생님과 친구들의 비웃음을 사야하고, 부모의 가슴에 공허함을 안겨주고 만다. 감추고 싶은 자신의 민낯이 드러나는 순간이 암담한 자식과 텅 빈 복도에서 무릎 꿇은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 그들 앞에 우린 조용히 자리를 비워줄 뿐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그것이 자식이라서 부모라서 이미 지나왔고, 또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는 여고생처럼 까르르 웃으며 잡고 있던 내 손을 세게 꽉 쥐었다. 엄마에게서 받은 어떤 전류 같은 것이 찌르르 내 몸으로 흘러온다. 엄마는 내 눈을 잠시 바라보다 나를 꼭 안아 줬다. 내 키가 엄마보다도 큰데 아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수영아, 엄마는 말이지. 네가 어디에 있건 무엇을 하건 중요하지 않아.”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한 후 잠시 쉬었다가, 다시 한 번 천천히 끄덕끄덕했다. 중요한 게 무엇인지 말하지 않아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마 위로 부드럽게 바람이 분다. 엄마랑 떡볶이 먹기 딱 좋은, 4월의 밤이다.
93~94쪽
현준이는 오늘도 아빠를 찾아본다. 아빠에게 진한 부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아빠의 부재와 함께 아빠에 대한 사소한 추억들이 떠오른다. 아빠의 마지막 모습이 찍혔다는, 봤다는 제보자에게 시간을 할애하면서 아빠를 찾기 위한 노력이라고 스스로를 위안삼아 본다. 그러나 곧 그의 정체를 알게 되고, 아빠는 병원 냉동고에서 현준이와 마주한다.
“절망에 빠진 사람을 보는 게 좋아. 내 인생이 나은 것처럼 느껴져. 마음에 위로가 돼.”
남자는 생각한 것보다 훨씬 미친놈이다.
“사라진 지 14개월이면 이제 뭐 다 됐네. 그거 알아? 희망을 완전히 잃어야 절망도 끝나는 거야. 희망이 없을 때 절망하는 게 아니고. “
[중략]
“왜? 왜 그런 거짓말을 해요?”
“심심하니까. 그리고 사람들이 나를 갑자기 필요로 하잖아.”
111~112쪽.
우리 인간은 모두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고 싶어한다. 그것이 사라지는 순간,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리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신호를 보낸다. 십대들의 반항도 부모, 친구, 교사 등 대상은 다르지만 누군가의 관심을 받고 싶어 더욱 거칠고 강하게 나타나는지도 모른다. 마치 중독성처럼 점점 깊게 상처를 내야만 반응이 전달되기 때문에 점점 더 정상궤도에서 벗어난 행위로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을 채우려고 한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상처는 미처 들여다보지 못한 채로 말이다.
우리의 십대들은 모두 아프다. 잘나도 아프고 못나도 아프다.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어른들의 마음 또한 아프다. 그들이 겪어내는 많은 일들이 어른들의 눈에는 어린 녀석들의 발악쯤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들이 만나는 학교라는 세상과 사회라는 세상은 권리와 의무, 경쟁과 유혹으로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성장 속도와 그들보다 앞서고 있다고 자부한 어른들의 성장 속도가 다르다면, 누가 누구에게 맞춰가야 하는지 생가해 본 적 있는가.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이 나는 싫다. 다만 꽃을 피우기 위해 그 시간만큼 기다릴 줄 아는 청춘들에게, 아낌없는 응원을 보내고 싶다. 있는 그대로의 그대들이 제일 어여쁜 청춘이고, 십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