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아이가 가슴에 손을 대고 말하였습니다.
“엄마, 여기에 자전거가 달려.”
아이의 표현이 너무 예뻐 여기저기 자랑했습니다.
타고 다니는 교통수단의 하나로만 여겼던 자전거가 그토록이나 멋지게 쓰일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저는 어느새 하나의 사물에서 하나의 모습으로 밖에 읽어 내지 못하는,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마치 진리인냥 다른 생각을 인정하지 않는 어른이 되어 있었던 거죠.
클로드 부종의 파란 의자.
그 속에서도 저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에서 새로움을 발견하는 아이의 모습도 있었습니다.
의자는 앉는 것일뿐이라는 낙타가 저였고, 자유자재로 변화하는 의자를 가진 에스카르빌과 샤부도가 아이였습니다.
밑에 들어가 숨기, 모든 교통수단으로 변화하기, 책상과 계산대로의 변신, 사나운 짐승을 막는 방패, 서커스에서 재주 부릴때 쓰이는 도구 등등등.
이렇듯 의자로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무한정이었고, 의자로 즐길 수 있는 놀이 또한 무한정이었지요.
“다칠라, 조심해야지.”하며 놀이 중간에 끼어드는 엄마처럼 “의자는 말이야, 그 위에 앉으라고 있는 거야.”라며 의자에 버티고 앉는 낙타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지요.
놀이가 중단되어버린 에스카르빌과 샤부도는 얼마나 실망스러웠을까요?
안전과 소음과 위생 등등을 문제 삼으며 놀이를 막을때 제 아이는 또 얼마나 슬펐을까요?
아이에게 사과하는 뜻으로 에스카르빌과 샤부도에게서 파란 의자를 빌려와야겠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으로 변할수 있는 그 요술 의자를 말이지요.
즐거워할 아이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행복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