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까만돌을 한참 재미있게 읽고 있을 때 또 한 학생의 자살 소식이 들렸다. 소위 교육1번지라고 하는 강남 대치동에서 성적도 상위권을 유지하던 고1학생이 ‘공부가 어렵다. 학원 다니기가 힘들다’는 말을 남기고 그동안 해보지 못한 염색 머리를 며칠 전에 한 채 스스로 몸을 던졌다.
이 학생에게 까만돌이 옆에 있었다면? 그의 말을 가만히 들어 주는 까만돌 같은 존재가 주변에 있었다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어린 학생들이 폭력과 성적의 과중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계속하여 꽃다운 나이에 자신의 생명을 던지고 있다. 부모된 한 사람으로서 학생들에게 가혹하다 싶은 현 교육제도와 사회 구조들을 제발 개선했으면 하는 절실한 바람을 가져 본다.
책의 주인공 지호는 왕따다. 지호에게 아토피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지호반의 악당 삼총사는 지호를 호시탐탐 괴롭힌다. 지호는 2년 전에 교통사고로 엄마를 잃었다. 아빠는 그 충격으로 스스로 말문을 닫은 채 살아가고 있다. 아빠가 전혀 지호를 돌보지 않기 때문에 지호와 아빠는 할아버지댁으로 내려와서 지내고 있다. 지호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새와 벌레와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그런 지호를 보고 아이들은 “미쳤다”며 더 놀려댄다. 어느 날 옆집에 이사온 줄리 아줌마와 지호가 부딪히는 바람에 아줌마 가방이 열리고 물건이 와르르 쏟아진다. 미처 주워 담지 못한 까만돌을 지호가 발견하는데 돌이 “간지러워!” 하며 말을 하는 것을 듣게 된다. 줄리 아줌마의 돌이기는 하지만 말하는 까만돌이 너무 신기해서 방에 가져 온 지호는 그때부터 까만돌을 향해 자기 맘속에 담아 놓은 이야기를 수다쟁이처럼 털어 놓는다. 까만돌은 결코 친절한 상담자는 아니다. 지가 내킬 때만 말을 한다. 그래도 지호는 좋다. 자기 말을 누군가가 들어준다는 게 말이다. 아니 속내를 털어 놓을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 지호는 살 것 같다. 삼총사에게 매번 당하는 지호를 향해 까만돌은 ” 너는 왜 당하고만 있는데? “란 일침을 놓는다. 그제서야 지호도 삼총사를 향한 역습을 시작한다.
까만돌을 통하여 지호가 서서히 자신을 방어하기 시작할 무렵, 우연히 아빠가 지호의 서랍 속에서 까만돌을 발견하게 된다. 아빠 또한 까만돌이 말을 하는 것을 보고 신기하여 까만돌을 주머니에 넣은 채 산책을 한다. 아빠 역시 까만돌에게 그 동안 어느 누구에게도 꺼내지 못한 자신만의 비밀을 털어 놓는다. 아빠 또한 아빠 만의 큰 아픔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래서 말문을 닫아 버리고, 지호도 돌보지 않은 채 지내올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라도 소중한 지호를 또 잃어버리지 않도록 아빠가 제자리를 찾길 바랄 뿐이다. 더 늦기 전에 말이다.
까만돌은 줄리 아줌마, 지호, 지호 아빠의 이야기를 담담히 들어 주고 그들에게 평안을 선물한다. 까만돌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섣불리 참견하지도 않는다. 까만돌의 존재만으로도 그들은 위안을 얻는다. 그들이 까만돌에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 놓는 순간 그들은 스스로 상처를 치유 받는다. 나에게도 그런 까만돌이 있다. 내가 속상할 때, 내가 화가 날 때, 내가 억울할 때마다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까만돌이 바로 남편이다. 그런 남편이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여자들이 남자보다 수다를 좋아하는 이유도 바로 그런 카타르시스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허심탄회하게 털어 놓다 보면 해갈이 된다. 그렇지 않고 속에 꼭꼭 담아 두면 병이 생기고 만다.
앞서 말한 그 학생도 누군가에게 좀 더 일찍 자신의 속내를 털어 놓았다면 그렇게 극단적인 선택으로 치닫지 않았을까 싶어 정말 마음이 아프다. 그 나이에는 부모보다는 친구가 더 가깝고 친밀한 존재인데 학생들이 서로서로에게 그런 까만돌 같은 존재들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이 서로에게 속내를 털어낼 만한 시간조차 부족한 현실이니-방학 동안에도 학기보다 더 치열하게 학원 순방을 해야 한다고 한다.-학생들에게 서로에게 까만돌 같은 의미 있는 존재가 되어라고 말하는 것부터가 한낱 이상적인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어야 이런 경쟁구도와 성적지향주의를 개혁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