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좋은 얘기도 엄마가 하면 아이들은 잔소리로 듣는다. 아이들은 엄마를, 자신이 하고 싶은 건 못하게 하고 하기 싫은 것만 하게하는 사람으로 이해하는 듯하다. 어릴 때는 그래도 엄마가 무서워 말 듣는 시늉이라도 하지만 좀 더 크면 만만치 않은 싸움이 된단다. 간혹 엄마의 말이 영향력이 아닌, 힘을 발휘할 때가 있긴 하다. 화난 얼굴에 강압적인 어투로 말할 때이다. 아이들이 있는 집이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이럴 때 엄마가 하고 싶은 얘기를 문학의 힘을 빌어 하면 어떨까 싶다. 문학의 특징인 ‘돌려말하기’를 우리 삶에 적용시켜 보는 거다. 아이가 선호하는 장르의 책을 골라 넌지시 전하는 것은 어떨까? 아이들의 웃는 모습이야말로 엄마에겐 자양강장제니, 일석이조가 따로 없다.
‘퇴마록’으로 한국형 판타지를 개척한 이우혁이 청소년 판타지물을 들고 돌아왔다. 아빠로서 자신의 딸에게 가르쳐주고 싶었던 내용들을 소설속에 담았단다. 단순히 자신의 딸에게만이 아닌, 이 땅의 학생들에게 부모의 마음을 대변하는 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언젠가부터 양육처로서의 기능은 줄어들고 단순히 밥먹고 잠자는 곳으로 변하고 있는 우리네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잠시라도 문학을 통해 휴식을 선사한다면 아이들의 쳐진 어깨도 가벼워질 것 같다.
‘고타마’는 울프블러드라는 왕국의 어린 왕자 듀란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다. 크롬 대륙 내 이스트랜드에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졌다. 백 년 동안 전쟁이라곤 없었는데, 콜드스틸 왕국의 크롬웰이 나이엔 왕국을 침범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이엔 왕국은 듀란 어머니의 고국이기도 했다. 뒤보아왕은 큰 아들 올란 왕자와 왕비까지 대동하고 콜드스틸을 치러 출정한다. 이제 궁에는 겁쟁이 듀란 왕자와 호위대장 스탕달, 호위장 줄리앙, 한쪽 눈의 여전사 까미유, 늙고 뚱뚱한 사띠 대신, 아모르의 성녀 자끌린, 왕실의 대마법사 플로베르등 소수만 남았다. 늘 자신없고 두려움이 많은 듀란은 궁의 무겁고 우울한 분위기를 힘들어한다.
전쟁이 벌어진지 6주쯤 지난 어느날, 전쟁터에 나갔던 쿠르베 장군이 온 몸에 큰 상처를 입은채 궁에 실려온다. 이스트랜드의 명장이라 불리는 장군의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진다. 이스트랜드의 정예군이 콜드스틸에게 당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마법으로 만들어진 골렘으로 왕과 왕비, 올란 왕자까지 모두 생포되었다고 했다. 장군은 올란 왕자의 전언이라며 자신이 데려온 엘란 왕국의 어린 왕녀 앤 공주를 듀란의 정혼녀라 일러준다. 듀란은 자신의 뺨을 때리며 호통치는 사나운 앤이 무섭기만 하다. 그 때 갑자기 왕궁이 흔들린다. 어느샌가 골렘들이 쳐들어왔다. 겁이 난 듀란은 왕궁의 지하실로 뛰어내려가고 거기서 작은 빛 보다 더 작은 고타마를 만나게 된다.
고타마는 듀란이 지금껏 만나지 못한 따뜻함과 다정함으로 듀란을 대한다. 스스로를 겁쟁이라 생각했던 듀란은 고타마의 격려로 두려움의 외피를 하나씩 던져버리게 된다. 자신을 ‘스스로 이겨 나가는 자’라 밝힌 고타마는 듀란에게 자신이 도와줄 수 있는 힘에 대해 알려준다. 고타마의 힘은 고타마가 제시한 3 가지 조건을 충족했을 때만 사용할 수 있다. ‘첫째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힘만 원할 수 있고, 둘째 스스로가 확실히 깨닫고 아는 힘만 원할 수 있으며, 셋째 이전에 사용했던 힘보다 더욱 강한 힘만 원할 수 있다.’는 규칙이다.
듀란은 고타마와 동행하며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고, 이를 통해 스스로 생각하는 힘도 키워간다. 또한 플로베르의 지도로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도 배우게 된다. 그러나 계속되는 싸움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면서 급한 마음에 불러선 안될 원한의 힘을 써버리게 된다. 고타마는 조건이 충족되기만 하면 옳고 그름을 떠나 자신의 힘이 방출되는 것을 억제할 수 없다. 듀란은 자신이 큰 실수를 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원한의 힘으로는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자신을 평가하는 눈을 자아상이라 한다. 부정적이고 왜곡된 자아상은 자신의 삶을 불행하고 소모적으로 만든다. 이우혁은 듀란을 통해 부정적인 자아상이 긍정적으로 바뀌었을 때 어떤 일이 생기는 지를 잔잔하고도 진지하게 보여준다. 또한 겁쟁이에 말더듬이로 왕실의 걱정을 끼쳤던 듀란이 고타마를 만나 어떻게 변하는지를 통해 좋은 친구의 중요성도 비춘다. 만약 이런 주제들을 엄마의 이야기나 딱딱한 내용의 책으로 접했다면 자연스럽게 전달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삶이란 마땅히 이래야한다는 당위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모의 입장에서 들려주고 싶지만 들려주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아직 때가 아니어서, 때론 어색해서, 그도 아니면 잘 몰라서 그럴 때가 있다. 그런 상황을 작가 이우혁도 겪었을 터이다. 작가와 부모의 교집합속에서 추출해낸 이야기들이 아이들의 마음에 가닿기를 바란다. 오랜만에 판타지를 읽어서였는지, 아니면 아이들에게 적합한 책을 읽어서였는지 내 마음이 무척 가볍다.
사진출처: 나는 시시한 사람이다. http://www.cyworld.com/heebee7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