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룡소 동시 문학상

수상작 및 작가

당선작

대상: 김용진 『알딸딸하다』

심사위원: 허연(시인), 황유원(시인)


심사 경위

제4회 비룡소 동시 문학상 심사 결과를 발표합니다. 지난 6월 30일 원고를 최종 마감한 비룡소 동시 문학상에는 총 137명의 응모작이 접수되었습니다.
심사위원으로 허연, 황유원 시인을 위촉하였습니다. 먼저 응모작을 각각 위원들에게 보내어 심사한 결과 총 5명의 응모작을 본심작으로 천거, 8월 23일 본사에서 본심을 진행하였습니다. 논의 끝에 김용진의 『알딸딸하다』를 당선작으로 선정하였습니다. 응모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본심작

『요즘 국어사전을 열어보고 있어』
『하얀 짜장 잠자리』
『눈사람 체조』
『똥파리』
『알딸딸하다』

심사평

이번 비룡소 동시 문학상 투고작들의 수준은 예년에 비해 높았다. 작품은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고, 긴 시간 공을 들인 듯한 완성도가 눈길을 끌었다.
응모작을 살피며 세운 나름의 심사기준은 아래와 같다.
우선 ‘어른의 설계’가 지나치게 드러나는 작품은 배제했다. 성인이 썼다 하더라도 동심의 세계라는 커다란 진공관 안에서 시적 성취가 일어나야 하는데, 어투와 단어 선택만 아동의 것을 차용한 어른의 시가 있었다.
다음으로는 대부분의 시가 ‘자연 관찰 일기’의 일색인 응모작도 본심에 올리지 않았다. 시인의 개성이 드러나기에는 소재가 한정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쓰인 동시가 아니라 3, 40년 전쯤의 정서를 담고 있는 듯한 작품들도 제외하였다. 지금 어린이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대의 모습과 정서를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러한 심사기준을 넘어서 수준 있는 시 세계를 보여 준 5편의 본심작을 두고 논의하여 당선작을 선정했다. 최종에 올라온 모든 작품이 높은 시적 성취를 보여 주고 있어 쉽지 않았다.

『요즘 국어사전을 열어보고 있어』는 우선 개성이 돋보였다. 상당수의 시가 국어사전이라는 모티프를 소재로 하고 있는데 그 발상이 좋았고, 흔들림 없는 시적 완성도가 눈길을 끌었다. 연작 형태의 시가 계속 이어지다 보니 한 편 한 편 시들의 차별성이 드러나지 못하는 느낌이 좀 아쉬웠다.

『하얀 짜장 잠자리』는 신선한 조형적인 완성도를 갖춘 시도가 눈길을 끄는 작품이었다. 편마다 소재에 걸맞은 도형적 틀을 선택하고, 그것에 맞게 언어를 배치한 노력이 훌륭했다. 힘든 작업이었을 텐데도 정교함을 잃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완성한 점이 좋았다. 계속 시도하면 근사한 세계를 보여 줄 시인으로 보인다.

『눈사람 체조』는 리듬과 반전을 잘 활용하면서 시적 성취를 유지하는 시인의 역량이 돋보였다. 탁월한 관찰력도 눈길을 끈다. 작품 간의 편차가 조금 보이는 것이 아쉬웠다.

『똥파리』는 읽는 재미와 위트가 돋보이는 좋은 작품이었다. 매 편 각각의 반전이 있었고 시적인 리듬도 읽는 재미를 주었다. 다만 소재가 특정 범주에 몰려 있다는 느낌이 있다.

『알딸딸하다』는 무릎을 치게 만드는 시적 반전이 좋았다. 무엇보다 개성이 있다.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거의 들지 않는, 자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였다. 상상력이 기존 동시들과는 다른 영역을 가지고 있다. 짧은 시편들이 많았지만 읽는 동안 짧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만큼 자기만의 방식으로 차곡차곡 쌓아 올린, 매너리즘을 거부한 듯한 시 세계가 탄탄했다. 당선작이 되기에 충분한 장점을 고루 갖추고 있었다.

허연(시인)

제4회 비룡소 동시 문학상에는 작년에 이어 단행본으로 출간해도 손색이 없을 듯한 수준작이 여럿 응모되었다. 그만큼 자기만의 세계관을 구축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한 작품이 많았다는 뜻인데, 그렇다 보니 본심은 물론이고 예심도 전혀 녹록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눈에 불을 켜고’ 좋은 작품 가운데 더 좋은 작품을 발굴하듯 찾아내야 했다.
내용과 형식 면에서 ‘전형적인 동시’와 ‘비전형적인 동시’ 사이를 오가는 응모작들 가운데 다수를 차지한 쪽은 물론 전자였다. 아이 화자의 목소리를 빌려 주로 학교와 집 안에서 일어난 일들, 동식물이나 곤충을 비롯한 주변의 생물과의 에피소드 등을 간결하고 리드미컬하게 기록한 시들. 문제는 아이가 아닌 시인이 아이의 목소리를 빌려 쓰다 보니 조금은 시대착오적으로 읽히는 시들도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요즘 아이들이 이전 세대에 비해 나무나 꽃의 이름을 훨씬 더 모르는 것은 정녕 안타까운 일이고, 그처럼 사라진 호기심을 되살리는 것도 동시가 마땅히 떠맡아야 할 임무이리라.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는 농경사회가 아니다. 과거의 기억 속에 걸린 빛바랜 사진을 자꾸 끄집어내는 대신 지금 우리의 현실을 포착해야 자연도 더 생동감 있게 다가올 수 있지 않을까.
‘비전형적인 동시’는 우리가 생각하는 동시의 경계를 뒤흔들어 준다는 점에서 늘 매력적이고 반갑게 다가온다. 소재적으로는 다문화가족 자녀 혹은 사회적 약자를 화자로 삼거나 블랙박스 등 하나의 특이한 소재에 천착해 이를 다양하게 변주한 경우, 형식적으로는 단순한 ‘구체시(具體詩)’를 넘어 디자인에 가까운 ‘비주얼 포에트리(Visual Poetry)’를 구현한 경우가 여기 속했다.
이처럼 다양한 작품들 가운데 너무 익숙하거나 설익었거나 작위적인 작품을 제외하니 남는 것은 하나같이 ‘자기 목소리’를 가진 작품이었다. 모든 예술이 그렇겠지만, 시에서 자기 목소리를 가진다는 것은 자신이 시인임을 주장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요즘 국어사전을 열어보고 있어』는 무엇보다도 기획력이 돋보였다. 국어사전에 실린 단어를 소재로 무려 마흔여섯 편의 연작시를, 그것도 어느 정도 완성도를 유지하며 쓰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몇몇 시에서 보여 준 리듬감도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훌륭했다.

『하얀 짜장 잠자리』는 앞서 언급한 ‘비주얼 포에트리’ 작품으로, 혼자 보기 아까울 만큼 다양하고 기발한 시도를 보여 주었다. 출간되는 동시집에는 보통 그림이 함께하기 마련인데, 이 작품은 그림이 따로 필요 없겠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가독성 부분이 조금 아쉽긴 했지만, 지나고 보니 어느 방향에서 읽어야 할지 고민하는 시간도 유쾌한 경험이었다.

『눈사람 체조』는 우선 그 완성도와 다양성 면에서 높은 점수를 얻었다. ‘마음’이나 ‘슬픔’ 같은 단어를 거듭 호명하며 작품 전반에 어떤 정서를 형성하는 것은 좋았으나, 동시치고는 다소 어둡고 설명적인 작품이 많은 것도 사실이었다. 「얼음 꽁꽁」처럼 적당하고 은근히 어두우면서 직관성 또한 잃지 않은 작품들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똥파리』는 마지막까지 당선작과 경합한 작품으로 ‘자기 목소리’가 다른 누구보다 셌다. 굳이 말하자면 ‘전형적인 동시’에 속하는 경우이겠으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고 느껴질 만큼 리듬감, 말맛, 의외성, 신선함 등에서 독보적이었다. 앞서 시에서 자기 목소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 목소리가 개성적이기만 하고 매력적이지 않으면 그것도 난감한 일이다. 『똥파리』의 화자가 들려준 용기 있는 목소리는 간혹 단순히 매력적인 수준을 넘어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알딸딸하다』에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특징은 독특한 형식이다. 짧아도 너무 짧은 게 아닌가 싶을 만큼 간결한 길이, 그리고 거의 어김없이 단도직입적으로 우리의 허를 찌르고는 무심히 저 갈 길을 가버리는 듯한 마지막 행. 응모작 전체가 이 단순한 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알딸딸하다』가 다른 작품을 모두 제치고 수상작이 된 것은 그 단순함에 내장된 시니컬하면서도 기발하고 재치 있는 자기 목소리와 깊이 때문이었다. 의외의 반전이 그저 가벼운 웃음으로 그치지 않고 생각으로 이어지더니 점점 여러 갈래로 상상력을 부풀렸다. 단 두 줄만으로도 잊히지 않는 강렬한 시를 만들어 낼 줄 아는 힘이라니! 시인은 ‘후크 송’의 단순하고 강렬한 후렴구 같은 구절을 쓸 줄 안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자기만의 목소리를 단 몇 마디만으로 각인시킬 줄 안다.

당선자에게는 축하의 말을, 낙선자에게는 위로와 격려의 말을 건넨다……는 뻔한 말로 심사평을 마무리 지으려는 순간, 갑자기 예심 때 본 작품 하나가 떠오른다. 앞서 아이 화자의 목소리를 빌린 경우에 대해 잠시 이야기했는데, 진짜 아이가 자필로 열심히 쓴 노트를 응모작으로 보내온 것이다. 보기만 해도 연필 냄새가 날 것 같던 노트. ‘시심’이라는 말이 그대로 형상화된 듯한 노트. 이상하게도 그 노트에 이 세상의 모든 시인이 쓴(쓸) 시가 다 들어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모든 시인이 그 노트 앞에서 공평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다들 다시 그 노트를 펼칠 시간이다.

황유원(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