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인가 중학교에 다니는 큰 아이가 영화를 보고 싶다고 했다. 무슨 영화인가했더니 ‘제니와 주노’라기에 알아보니 15세 중학생 주인공들이 실수로 아이를 갖게 되고 그 아이를 지켜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이야기라나.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말았다. 고등학생도 아닌 중학생이 아이를 갖는 영화라니. 이런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물론 현실 속에서 그런 아이들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수는 극히 적을 것이고 어린 나이에 아기를 갖는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연애를 하는 아이들을 순수하게 그려낸다는 사실이 경악스러웠다. 도대체 어떤 의도로 영화를 만들었는지 의심스러웠다. 바른 성교육? 그건 절대로 아니라고 본다. 생명체로서의 아기를 성숙한 인간으로 키워 나가려면 무엇보다 부모가 성숙해야한다고 고집스레 우겼다.
엄마와 단둘이 살고 있는 라본은 모범생이다. 열심히 공부해 대학을 가 가난한 동네를 떠나는 것이 인생의 최대 목표이다. 대학 등록금의 모으기 위해 시작한 아기 봐주는 아르바이트는 하며 라본은 졸리를 만나게 된다. 졸리는 라본보다 겨우 3살 더 많은 두 아이의 엄마다. 각기 아빠가 다른 두 아이를 키우며 직장에 다니는 졸리의 집은 엉망이다. 여기저기 얼룩진 구석구석은 발 디딜 곳이 없다. 거기다가 성추행에 저항하던 졸리가 해고되며 어려움에 봉착한다. 잘못된 정보로 복지 기관에 도움을 청하면 아이들을 빼앗기게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졸리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현 상태에서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할 지 졸리는 알 수가 없다. 엄마로서도 학생으로서도 사회인으로서도 졸리는 당당히 설 수가 없다.
졸리는 누구도 자신에게 ‘어떻게 해야하는지’알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졸리를 지켜보는 라본은 혹시 자신이 자신의 필요에 의해 졸리를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한다. 라본을 따르게 된 질리와 제레미의 성장을 지켜보며 라본은 졸리가 어떻게 해야하는지 동행해 준다. 졸 리가 세상에 손을 내밀어 학생의 신분으로 돌아가게 도와주고 엄마로서 배워야할 것들을 배우도록 교육기관을 찾도록 해준다. 그런 일들이 질식 상황에 놓인 질리의 목숨을 구하게 된다. 이제 졸리는 엄마로서, 학생으로, 사회인으로 나설 준비가 된 것이다.
열심히 일해 모은 돈으로 산 오렌지를 나쁜 아이들에 의해 레몬으로 바꾸어 가져온 장님 여인에게 사람들은 말한다. 왜 진작에 손에 쥐여진 느낌으로 바뀐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냐고. 하지만 그녀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왜냐고 묻는 것이 아니다. 지금 내 손에 쥐고 있는 레몬으로 내 아이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느냐하는 것이다. 삶은 오렌지를 손에 쥘 수 있는 상황만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회 속의 또다른 졸리에게 자신이 무엇을 해야하는지 알려주는 일이 그들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일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