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나 보든의 『캐리의 전쟁』은 표지가 싱그러워 몇 번이나 손에 들었던 책이다. 하지만 막상 펼쳐보지는 못했는데, 읽고 나니 뭐라고 형용하기 힘든 아름다운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2차 세계 대전을 피해 산골에 오게 된 캐리와 닉, 두 남매의 이야기는 우리가 인생에서 맞닥뜨릴 수 있는 두 가지 놀라움을 전한다. 아주 경이로우면서도 환상적인 ‘놀라운 순간’들은 우리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전쟁을 떠나 있다는 상황 설정 때문에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이 생각나지만, 캐리와 닉이 살게 된 이 산골 마을에는 전쟁의 영향이 미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도시에 비하면 좁고 낙후한 이 공간조차도 전쟁의 무자비한 폭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바깥의 상황에 예민하게 촉수를 세우고 있는 에번스 씨의 성격은 어느 정도 전쟁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오빠 에번스 씨의 비가시적 폭력을 당연하게 여기고, 늘 눈치를 보는 루 이모의 성격도 마찬가지다. 캐리와 닉은 어떤가? 부모님과 떨어져서 소식을 기다리는 캐리와 닉은 초조함과 불안함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불안한 가운데에도 아이들은 특유의 순수함으로 시골 생활을 즐긴다.
처음부터 아이들이 시골 생활에 적응한 것은 아니다. 닉은 기차를 타고 오며 모든 음식을 게워 낼 정도로 두려움과 거부감으로 가득 차 있다. 시시 때때로 에번스 씨와 대립하는 닉은 그 외의 어른들에겐 순수하고 거짓 없는 모습을 보이면서 어울린다. 한편 캐리는 에번스 씨의 상점 일을 도우면서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함께 피란 온 앨버트와 그를 데리고 있는 자러가 부인, 헵시바와 두터운 우정을 나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과 금욕적이고 완고한 에번스 씨의 갈등, 에번스 씨와 오래전에 의절한 누나 자러가 부인과의 갈등, 캐리와 닉의 갈등 등 작고 큰 갈등 들이 이 소설에 산재해 있다. 하지만 캐리는 갈등을 완화시키려고 노력한다. 닉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마음을 열고 위로해 준다면, 캐리는 근본적인 갈등을 없애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이 아프고 힘들지라도, 캐리는 자신의 생각을 굳게 믿고 그대로 행한다.
누가 아이들을 보살핌 받아야 할 약한 존재라고 했는가? 캐리와 닉은 스스로의 힘으로 탄광촌과 드루이드 바닥집에 깊이 뿌리 내린다. 전쟁의 포화도 잊고 현재의 즐거움과 희망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랬기에 산골 마을은 초라하고 황폐한 마을이 아닌 아름답고 그리운 고향으로 아이들의 가슴 속에 남게 되는 것이다. 드루이드 바닥집은 아이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을 뜻한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의 고통은 그들을 성장시킨다. ‘성장’은 인생에서 만날 수 있는 놀라운 보석 중의 하나이다.
그런가 하면 캐리는 평생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된다. 자신이 전설을 무시하고 해골을 던져 버려 드루이드 바닥집에 불이 났다고 생각한 캐리는 진실을 알아볼 용기를 잃어버렸다. 그래서 꽁꽁 숨겨뒀지만, 자신의 아이들을 이끌고 옛 추억의 장소로 다시 갈 만큼 그 곳에 대한 애정은 가득하다. 그녀의 아이들이 발견한건 바로 엄마의 ‘추억’이다. 게다가 그 추억은 살아있었다! 예전과 똑같이 캐리를 기다리고 있는 헵시바의 모습은 30여년의 세월을 초월해 뭉클한 감동을 준다. 인생이 우리에게 주는 아름다운 보석인 ‘추억’이 변하지 않은 채로 우리 앞에 반짝 빛나고 있는데, 그 앞에서 눈물짓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풀 수 없는 과제처럼 불편하게 남아 있던 진실들은 마지막에 가서야 화해하고 미소 짓는다. 그래서 마지막 부분을 읽는 동안 울 수도 없고 웃을 수도 없는 미묘한 감정의 줄다리기를 경험했다. 하지만 감동적이라는 사실 만큼은 분명하다. 작가의 이야기 잣는 솜씨는 충격적일만큼 아름다웠고, 그가 전하려고 했던 것이 무엇이든 간에 이 소설은 성공했다고 느껴졌다. 우리가 인생에서 만날 수 있는 찬란한 보석들을 ‘잘’ 꿰었기 때문이고, 그 보석들이 독자의 시간을 더듬어 오르게 하기 때문이며, 다시 조우한 추억 속에서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게 하기 때문이다. 잊고 있던 소중한 순간들을 얼싸안고 싶다면 이 책을 반드시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