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리 알려진 책을 펴내거나 읽을 때는 출판사나 독자 모두 모험을 시도해야 한다. 이미 알려진 것 외에 특별한 무언가가 쌍방간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다시 읽으니 새롭다거나 예전엔 놓쳤거나 담을 수 없었던 것이 담겨져 있어야 한다. 어릴 때 한 권의 동화로 가볍게 읽었던 책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 그 시대의 정서와 분위기를 고스란히 전해주면, 땅속에 묻힌 보물이 제 모습을 되찾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줄이고 줄이느라 사라져야 했던 세세한 내용들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 완성된 모습은, 신간을 읽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재발견의 기쁨을 선사한다.
’80일간의 세계 일주’는 지금으로부터 140여 년 전에 선보인 책이다.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다른 시대의 이야기인데도 읽으면 순식간에 동화되는 느낌이 든다. 그 당시 사람들의 새로운 세계에 대한 부푼 기대와 여행에 대한 순수한 관심, 다른 문화에 대한 궁금증은 모험심과 맞물리며 재미를 더한다. 쥘 베른은 기발하고 탁월한 상상력과 방대한 지리학적 지식을 통해 독자들을 소설 속의 현장으로 초대한다. 단순히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저런 급박한 상황에 놓이게 해 일체감을 조성한다. 그래서인지 쥘 베른이 신문에 이 책을 연재하던 당시 구독자들 사이에선 실제 내기까지 벌어졌다 한다.
’80일간의 세계 일주’는 또한 단순히 세상을 여행하는 모험기만은 아니다.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강한 개성의 소유자로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이야기에 윤활유 역할을 한다. 부자지만 사치스럽지 않고 점잖으며 말이 없는 필리어스 포그가 이 책의 주인공이다. 포그는 일가친척도, 친구도 없으며 내력도 알 수 없는 신비한 인물로 집과 클럽만 오가며 똑같은 일상을 반복한다. 포그 곁엔 불과 몇 시간 전에 채용된 프랑스인 하인 파스파르투가 있다.
“필리어스 포그와 잠시 말을 나누는 동안 파스파르투는 재빨리, 하지만 꼼꼼하게 주인으로 모시게 될 사람을 관찰했다. 마흔 살 정도 되는 것 같았고, 고상하고 잘생긴 얼굴에 키가 크고, 밉지 않을 정도로 살이 붙었고, 머리카락과 구레나룻은 금빛이고, 이마는 관자놀이에 주름 하나 없이 매끈하고, 혈색은 약간 창백한 편이고, 가지런한 치아가 아름다웠다……침착하고, 차분하고, 눈빛이 맑고, 눈을 많이 깜박이지 않고, 한마디로 영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냉정한 영국인, 그 학구적인 태도를 안젤리카 카우프만이 붓끝으로 잘 표현해 낸 바 있는 차가운 영국 신사의 표본이었다.” pp. 21~22
파스파르투는 고용된지 반 나절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 기겁할만한 이야기를 듣는다. 필리어스 포그가 당장 세계일주 여행을 떠난다며 짐을 싸라는 것이다. 그것도 80일 안에 지구를 한 바퀴 돌아와야 하며, 2만 파운드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이 걸렸단다. 게다가 일이 꼬이려는지 하필이면 필리어스 포그가 영국은행 강도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어 끈질긴 픽스 형사로부터 추적 당하는 일마저 생긴다. 픽스는 한치의 의심도 없이 필리어스 포그를 범인으로 생각한다. 포그의 인상착의도 그렇고, 비밀에 쌓인 사생활도 픽스의 추정을 확고히 하는데 일조한다.
한편 파스파르투는 이 여행길이 조바심도 나고 지루해지기도 한다. 다혈질에 쾌활하고 털털한 성격으로 주인에 대한 충성심도 많지만 파스파르투는 일도 잘 저질러 포그에게 손해도 꽤 끼친다. 냉정하리만큼 계산에 밝지만 포그는 사람을 구하는데 쓰이는 돈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세계일주 여행의 별미를 여기서 맛볼 수 있다. 상금을 차지하려고 시간을 앞당기는 데 포그가 돈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한 말에 대한 책임을 지려고 하는 것이다. 진정 신사라면 자신이 한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쥘 베른은 알려주려는 것이다.
여행길은 예상도 못했던 난관의 연속이었다. 그런데도 포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차분하게 자신의 길을 간다. 주위 환경이나 주변 사람들을 원망할만한 사건, 사고가 많았음에도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원망하지 않는다. 자신을 철썩같이 범인이라고 믿었던 픽스조차도 마음의 변화가 생기게 할 만큼 신사적인 행동을 잊지 않았다. 그런 포그에게 힘든 사건이자 인생을 변화시키는 사건이 생긴다. 죽은 남편을 따라 죽어야만 하는 어린 부인을 구하게 된 사건이다. 아우디 부인의 구출 작전은 목숨을 걸 정도로 위험한 일이었지만 포그는 파스파르투의 활약에 힘입어 안전하게 구출해낸다.
그후 포그 일행은 홍해와 인도양을 거쳐 홍콩과 일본, 태평양을 건너 미국을 거쳐 다시 런던으로 돌아오기까지 힘든 여정을 잘 마친다. 지나치거나 거쳐가는 여행지의 풍물과 여러 나라 사람들의 풍속은 독자의 기분을 환기해주며 세계 일주의 어려움과 즐거움을 동시적으로 전한다. 그간 홀로 지내며 다른 사람과 필요할 때만 어울렸던 포그는, 이 여행으로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게 되는 행운을 누린다. 여행경비를 제외하고 남은 돈은 파스파르투와 픽스에게 나누어주며 기쁨을 함께 한다.
만일 ’80일간의 세계 일주’가 생생하게 현장만 전달하고 모험만 강조했다면 당시에만 반짝 뜨고 말았을지 모른다. 그 시대에만 통하는 이야기들은 시간이 지나면 관심도 시들해지고 때론 책의 가치마저 떨어진다. 그런데 이 책이 아직도 변하지 않는 생명력을 가지는 것은 그 안에 작가의 세계관이 들어있기 때문일 터다. 자신이 냉정히 판단한 후 내린 결정에 대한 믿음과 약속을 지키려는 책임감, 그러나 약속보다 더 중요한 인간애를 붙들었기에 이 책이 공상과학 소설에 머물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었다고 본다. 모험과 환상 뿐 아니라 가치까지 담겨있는 책을 만나고 싶다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특히 삽화가 책읽는 묘미를 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