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무지 그 끝이 보이질 않는 광활한 들판에 꽃봉오리들이 수도 없이 들어차 있다. 조그마한 그들은 새싹이라기엔 걷잡을 수 없이 커 버렸고, 꽃이라기엔 아직 턱없이 미숙하다. 그들은 꽃이라면 거뜬할 여린 바람에도 꺾어질 듯 위태롭게 흔들리고, 높은 하늘만은 목이 빠져라 바라보며 좀처럼 자라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한탄한다. 또한 아직 채 피지도 않은 저를 아름답다 자만하며, 꽃처럼 보이기 위해 제 줄기를 억지로 잡아당기며 갖은 애를 쓴다. 모든 꽃봉오리들은 제 자신만이 이 들판에서 혼자요, 가장 처량한 철학자라 느끼며 잎사귀로 눈물을 훔친다.
그래, 이는 바로 뜨겁게 들끓으면서도 물가에 내놓은 어린 아이처럼 불안한 우리들, 푸른 청소년이다. 쉽게 취하며 쉽게 가라앉고, 쉽게 즐기며 쉽게 포기한다. 제각기 그 자신에겐 너무도 외롭고 고고하며 아름다운 존재이기에 유일한 이해자일 서로가 서로를 믿지 않으며 소통하지 않는다. 바퀴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한 외발 자전거, 또한 끝없는 푸름을 잠시나마 간직한 여름의 아이들. 그것이 우리이다.
다른 나라, 다른 인종이라는 것은 정말 고작 땅덩어리와 피부색의 차이인가 보다. 은연중에 그네들은 같은 또래라도 그 속의 것은 명백히 다를 것이라 줄긋던 것이, 이국의 두 소년 브란웰과 코너를 생생하고 친밀하게 접하며 언제 그랬냐는 듯 슬그머니 책장 너머로 사라졌다. 친구와의 관계가 날마다 달라진다고 느끼는 날렵한 예민함, 아이 취급을 받으며 느끼는 뜨거운 모멸감과 어른 대접을 받으며 느끼는 유치한 만족감. 그리고 사소한 마찰에서 불거져 나오는 황당하리만치 비현실적인, 그 순간만은 결코 제 힘으로 제어하지 못하는 헝클어진 분노와 증오심. 그들이 우리요, 우리가 그들이다. 불꽃처럼 피어오르는,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이 난해한 그들의 감정의 소용돌이를 보며 나는 뜨겁고 안락한 동질감을 느꼈다.
어디에나 있을 억만 개의 우정들. 그 우정들 중, 개임에 열광하는 또래와 달리 한 문장 짓기를 하나의 즐거운 놀이로 생각하고, 카드 게임으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재치 있고 유쾌한 우정이 몇이나 될까. 똑똑이들의 어른스러우면서도 또래처럼 달콤한 우정은 눈부시다.자칫 진부해질 수 있는 이야기를 카드 게임이란 번뜩이는 소재로 시원하게 환기시킨 작가의 솜씨가 놀랍다. 평면적인 구조를 벗어나 추리물의 영역까지 발을 디딘 톡톡 튀는 신선함. 저 먼 이국땅에 지금도 결 좋은 머릿결을 휘날리며 빤질거리고만 있을 비비안과 같은 치밀하고 현실적인 인물들. 그 즐거운 환상에 한참 동안 취해 있었던 탓에 지금이라도 당장 얇은 종이를 넘어 봄 햇살처럼 예쁠 아기 니키를 안고 싶다.
어른의 성숙함과 아이의 연한 마음을 겸비한 매력적인 소년 브란웰은 니키를 받아든 그 순간부터 변했을 것이다. 여름을 떠나보내고 낙엽 가득한 벤치에 가족과 함께 앉아 피부 가득 더없는 따스함을 느끼며, ‘진짜 어른’이 되어 가겠지. 여름의 절정, 한 때는 그 뜨거움에 데일까 걱정에 떨기도 했던 파란만장하고 화려한 소동, 젊디젊은 브란웰과 코너가 푸른 색 웃음을 한껏 짓고 있는 청춘이란 앨범의 한 장. 니키, 언젠가 네가 오빠 무릎에 앉아 그 푸르렀던 추억을 들으며 까르르 웃을 날이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