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중학생이 되고서 청소년 소설을 더욱 많이 읽게 된다. 한동안 너무나 천편일률적인 내용의 청소년 소설들에 질려 “또야?” 하며 조금 꺼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읽는 소설들은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우리 때만 해도 청소년 분야의 소설이 존재하지도 않았고 이후 급격히 늘어난 청소년 소설들은 청소년들의 사춘기적 마음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것을 더욱 돋보이게 하다 보니 가정 안에서, 친구 사이에서 문제가 있는 것으로 묘사되곤 했다. 하지만 이제 청소년 분야에도 변화가 찾아왔나 보다.
생각해 보면 청소년들에게만 걱정거리와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누구에게나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부딪히고 겪게 되는 문제가 있다. 그리고 그런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가 중요하다. 청소년기는 아직 자신에 대해 잘 모를 때이고 좌충우돌 여러 사건을 겪으며 자신 만의 방법을 터득해 나가는 때이므로 더욱 힘들게 느껴질 수 있다. 어른이라고 편하지 않다. 잘못된 방법으로 일관되게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도 있다. 문제를 직시하지 않고 피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 면에서 <반드시 다시 돌아온다>는 청소년 소설이지만 청소년들만 읽을 만한 소설은 아니다.
정하돈은 어느날 우연히 편지 한 장을 줍게 된다. 가볍게 펼쳐 든 그 편지는 바로 악마의 편지였다. 심지어 읽는 순간 머릿속에 입력되고 글자들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이 일을 누가 믿어줄 것인가. 이 없어진 편지를 도대체 어찌해야 할 것인가. 만약 편지의 주인인 악마가 나타나 왜 읽었냐고 해꼬지라도 하면 어쩔 것인지 하돈이는 정신이 하나도 없다. 믿어줄 만한 이 몇몇에게만 말해 본다. 그리고 그 말에 진지하게 답해 준 사람은 어릴 적부터 친구인 은비 뿐이다. 하돈은 은비의 충고대로 편지 내용을 전달해주기 위해 아낙스라는 악마를 찾지만 잘 안되다가 또다시 우연히 이 악마를 만나게 된다.
4차 산업혁명을 바라보는 마당에 악마의 이야기라니. 사실 좀 웃기다고 생각했다. 초등생 동화책도 아니고 온갖 잘난 척 하는 교만한 사춘기 청소년들에게 악마의 이야기가 통할 리가 있나 하고 말이다. 읽어나가며 어쩌면 이 아낙스라는 악마는 사실 진짜 악마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혼자만의 상상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래서 그 자체가 반전이다. 그리고 사실 이 악마라는 장치는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 중요한 건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너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대부분은 쉽게 갈 수 있다면 그 쉬운 방법을 택할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모른 척 덮어두고 저절로 해결되기를 바랄 수도 있다. 아니면 그 문제 자체를 있지도 않은 것처럼 치부하고 다른 길로 빠져버릴 수도.
<반드시 다시 돌아온다>에는 이렇게 다양한 선택을 하는 아이들이 나온다. 그리고 악마와 손을 잡는 과정을 통해 문제가 닥쳤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깨달아 간다.
“네가 그동안 게임에 쓰느라 날린 그 많은 시간들, 그것들은 반드시 너의 미래에 안 좋은 결과가 되어 나타날 거야. 인생은 원인과 결과가 이어지는 거니까. 네가 맨날 피해 다니는 문제들도 다 언젠간 반드시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단 소리야. “…197p
청소년 아이를 둔 나조차도 문제가 생기면 일단 덮어두고 싶다.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면 그럴 수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은비의 말처럼 언젠가는 되돌아올 문제라는 것을 알기에 헤쳐나갈 방법을 찾아본다. 모든 게 “귀찮아!”라고 말하는 청소년들은 무언가 자신들의 힘을 쏟아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 힘에 부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생각하고 노력하여 그 문제를 해결했을 때 한 단계 성장한 자신을 본다면 그 성취감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아주 소중한 경험과 교훈을 주는 책<반드시 다시 돌아온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