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다양한 경험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새로운 시간을 만들고, 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간다. 같은 상황을 두고도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생각을 전환시키는 계기를 만들기도 하고 되기도 하고, 때로는 불편한 시간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날마다 새로운 책들이 쏟아져나오는 중에도 어릴 적 읽었던 명작을 다시 해석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과 더불어 새로운 의미로 독자들을 찾아오고 있다. 어릴 적의 감성이 일깨워지면서 삭막한 현실에서의 고단함이 활자가 주는 상상력과 따듯함이 피로를 풀어주기에 충분하다.
긍정적인 생각으로 주위를 밝히는 에너지의 아이콘이라 하면, “빨간머리 앤”을 제일 먼저 연상하게 된다. “앤” “폴리애나” 두 소녀는 참 많이 닮아 있다. 고아로 부모를 잃고 새로운 환경을 만났다는 것, 주위의 변화에 민감하고, 수다스럽고 모든 이들과 사교적이라는 것이 그 둘의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앤”이 고아로 여러 가정을 돌며 여러 불행한 모습을 보며 자랐다면, “폴리애나”는 목사인 아빠와 엄마 사이에서 사랑받으며 자랐다는 것이 다르다. 또한 “앤”은 입양가정에서 경험한 일들로 주변에 도움을 주며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 반면, “폴리애나”는 아빠가 가르쳐준 긍정적 사고를 토대로 주변을 서서히 변화시키는 능력을 발휘한다.
삼가 아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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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알기로 목사님은 돌아가신 언니분의 남편이오나, 양가의 사이가 썩 좋지는 않다고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목사님은 귀하께서 언니분을 보아서라도 아이를 거두어 친척들이 동부에서 양육하실 의향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편지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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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링턴 양은 지금 마흔 살이고, 하늘아래 혼자였다. 아버지, 어머니, 언니들은 모두 죽었다. 여러 해동안 해링턴 양은 아버지가 남긴 이 저택과 막대한 재산의 유일한 주인이었다. 그런 고독한 생활을 대놓고 측은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고, 같이 살 친구나 동반자를 구하라고 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해링턴 양은 사람들의 연민도 조언도 모두 탐탁지 않았다. 자신은 외롭지 않다고 말했다. 혼자가 좋았다. 조용하게 지내는 것이 편했다. 그런데 이제는…….
해링턴 양은 인상을 쓰며 일어나 입술을 꾹 다물었다. 물론 자신이 좋은 사람이고 자신의 의무를 잘 알 뿐만 아니라 그 의무를 다할 능력까지 가지고 있다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폴리애나’라니! 이 무슨 우스꽝스러운 이름이란 말인가!
폴리애나. 15~16쪽
가족이 반대하는 결혼을 강행한 언니를 떠나보내고, 가족을 모두 떠나보낸 후, 대저택을 지키며 빈 자리를 혼자 살아가는 해링턴 양. 웃음도 슬픔도 드러내지 않고 삶에 대한 책임을 다하며 살아가고 있다. 해링턴 양에게 갑자기 온 편지 한 통은 조용히 살아가던 그녀의 삶에 소용돌이가 되어 휘몰아쳐온다.
가족 중 가장 사랑했던 언니의 딸, “폴리애나”에게 이모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사랑이란 감정조차 메마른 해링턴 양은 조카와 보이지 않는 선을 그으며, 이모로서 조카에 대한 책임만을 다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폴리애나의 존재는 단순한 조카의 자리를 넘어와 해링턴 양의 계획은 조금씩 틀어지고 만다.
“재미는 뭔 재미! 저 귀염둥이한테는 웃을 일이 아닐 걸. 이제부터 저 애는 마님이랑 같이 사는 거니까. 아마 저 애한테는 어딘가 달아나 숨을 곳이 필요할 거야. 그래, 티머시, 내가 그 숨을 곳이 되어 줄 거야. 내가, 바로 내가!
낸시는 그렇게 맹세하고는 돌아서서 폴리애나를 데리고 널찍한 계단을 올라갔다.
폴리애나. 36~37쪽
폴리애나는 부모를 잃고 혼자 남은 자신을 흔쾌히 받아준 이모에 대한 고마움이 마음 한 켠에 자리하고 있다. 또한 이모의 냉철하고 이성적인 모습에 크게 상처받지 않으며, 아쉽거나 불편한 상황들을 “기쁨놀이”로 생각을 전환시키며 기쁘고 행복한 순간으로 맞이한다.
병상에 누워 평생을 살아야 하는 부인에게, 외롭고 쓸쓸하게 살아가는 이에게, 부모를 잃고 고아원에서 나와 떠돌이생활을 자처한 친구에게, 신자들의 싸움으로 지쳐가는 목사님에게, 폴리애나는 기쁨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스스로 기쁨을 찾아낼 수 있는 힘을 길러주고 지금의 생활이 불행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기쁨놀이”는 앞으로 두 다리로 걸을 수 없을 거라는 진단 앞에 낙담하고 있는 폴리애나에게 기쁨의 선물이 되어 돌아온다. 그녀의 아픔을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은 날마다 폴리애나를 찾아와 폴리아나 덕분에 찾게 된 기쁨이 무엇인지, 그 기쁨이 폴리애나가 좌절하지 않을 희망으로 되살아나길 간절히 바란다는 메시지를 남긴다.
마을 사람을이 찾은 기쁨은 그들에게 삶을 변화시키는 힘을 발휘하게 하였고, 내가 가진 것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시간으로 만들어주기에 충분하였다.
어느 날 갑자기 닥친 폴리애나의 사고는, 폴리애나 자신 뿐만 아니라 해링턴 양에게도 마을 사람들에게도 또 한번의 변화를 일으킨다. 기쁨 놀이에 자신있던 폴리애나는 자신에게 일어난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는데 시간이 필요함을 느끼게 되었고, 해링턴 양에게 조카 폴리애나는 의무감이 아닌 사랑이었고 함께 하는 기쁨임을 일깨우는 시간이 되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폴리애나의 슬픔은 고마움과 절망으로 상실감을 느끼게 하였다. 작은 소녀의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의 전환은 주변 모든 이의 생각을 변화시키고 삶의 의미를 갖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어, 하지만 이모, 이모, 그냥…… 그냥 살아 있을 시간은 하나도 안 남겨 주셨잖아요.”
“살아 있을 시간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언제는 죽어 있기라도 한단 말이니?”
“아, 당연히 숨이야 늘 쉬겠죠. 그런 걸 배우는 시간에도요. 하지만 살아 있지는 않을 거에요. 잠잘 때도 숨은 끊임없이 쉬지만, 그건 살아 있는 게 아니잖아요. 제가 말하는 살아 있는 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예요. 밖에서 놀고, 책을 읽고 물론 혼자서 일도 하고, 또 언덕을 오르고, 정원에서 톰 할아버지랑 얘기하고, 낸시 언니랑도 얘기하고, 어제 지나온 무지 멋진 거리를 구석구석 다니면서 어떤 집이 있고 어떤 사람들이 살고 그런 걸 모두 알아보는 거라고요. 저는 그런 게 사는 거라고 생각해요. 이모, 그냥 숨만 쉬는 건 사는 게 아니라고요.”
폴리애나. 73~74쪽
삶이 무엇인지를 알고 실천할 줄 아는 소녀, 폴리애나. 그녀가 마을을 변화시킨 “기쁨놀이”는 단순하고도 쉬운 놀이의 하나이지만, 그것이 일으키는 변화는 매우 큰 파도가 되어 삶을 변화시킨다.
지금의 내가 처한 상황을 원망하고 포기하고 싶을 때 “내가 ~할 수 있어서 기쁘다” 또는 “내가 있어서 ~에게 기회가 되었으니 기쁘다”로 스스로를 탓하는 절망의 마음에서 헤어나올 수 있는 지혜와 용기가 생겨나길 소원해본다. 폴리애나의 기쁨놀이에 우리 모두 함께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