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책이다. 그렇다고 내가 페미니스트나 어떤 여성인권과 관련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신데렐라를 꿈꾸는 드라마가 넘쳐나고 아무거나 잡으면 공주 이야기일 확률이 높은 요즘의 현실에서 이 책을 읽었을 때의 그 통쾌함이란…
이것도 공주 이야기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보았던 그런 종류의 수동적이고 나약한 공주이야기는 아니다. 어찌보면 오히려 왕자가 마마보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연약하고 수동적이다. 게다가 그림도 꼼꼼하고 우아하게 그린 것이 아니라 내용과 딱 어울린다. 물론 처음에는 엘리자베스도 멋진 성에서 살고 좋은 옷도 많고 멋진 로널드 왕자와 결혼하기로 되어 있는, 흔히 알고 있는 평범한 공주였다. 그러나 용이 성을 불태우고 왕자를 잡아가는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은 여타 공주와 전혀 다르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알고 있는 공주라면 왕자를 찾으러 가지도 않을 테고 종이 봉지와 같은 것을 입지도 않을 테지.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는 당당한 모습과 이것이 아니다라고 느꼈을 때 당당히 돌아서는 그 용기. 거기다가 한 마디 따끔하게 충고해 주고 떠나는 장면은 딸 가진 부모라면, 특히 여자라면 속이 다 후련하다. 마지막 장에서 밝게 빛나는 태양을 향해 뛰어가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은 더이상 관습에 얽매이거나 자신을 옭아매는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는 당당하고 자유로운 모습이다. 딸 가진 부모들이 자신의 딸에게 바라는 것이 바로 이런 모습 아닐까. 거기다가 용을 물리치기 위해서 속임수까지 쓰는 것을 보면 무척 영리하기까지 하다. 자신은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용을 지쳐서 쓰러지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그 용은 참 미련하기도 하다. 하긴 사람 중에도 추켜 세워 주면 자신이 잘났는 줄 착각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으니 용에게 뭐라 할 수도 없겠다.
공주는 정말 별별 험난한 과정을 거치고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왕자를 구하러 갔는데 그 왕자가 하는 말이란… 진짜 공주처럼 차려입고 다시 오라고? 내 참 기가 막혀서… 진짜 한대 쥐억박고 싶다. 이쯤되면 아이들은 다음 장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전개될까 궁금해 한다. 그런데 역시 공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넌 겉만 번지르르한 껍데기야.’ 주변을 둘러보면 이처럼 겉만 번지르르하게 치장하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문제는 그 사람들이 그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데 있다. 아마 로널드 왕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따끔하게 충고해도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할 뿐더러 고칠 생각은 더더욱 없으리라고 본다. 아휴, 답답해라. 그리고 한심하고…
재작년에 이 책을 가지고 그림자극 공연을 했다. 워낙 내용이 재미있어서 아이들도 무척 좋아했다. 그런데 용은 그리기가 무척 까다로웠다. 아니 그리는 것이야 그냥 그리면 된다지만 그것을 오리는데 얼마나 힘들었던지. 용이 불을 뿜는 장면에서는 마치 진짜 불이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소리를 지르기까지 했다. 로널드 왕자는 왜 테니스 라켓은 들고 다녀서 우리를 힘들게 했는지 모르겠다. 그거 파느라고 엄청 고생했으니까. 로버트 문치는 글이 가벼운 듯 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무언가가 있는 글을 많이 쓰나보다. 로버트 문치의 글을 읽으면 재미있고 통쾌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이것저것 생각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