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장이의 아이들 – 가슴에 소원 한 가지씩 묻어두자
얼마 전에 <안인희의 북유럽신화>를 읽었다. 모든 문학적인 요소에 배경이 되곤 하는 신화를 읽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다소 생소한 이야기도 있었지만 그때 읽었던 이야기의 바탕이 있어서인지 이번에 읽은 <유리장이의 아이들>이 더 흥미가 있었다.
신화에서 소재를 구해 한 편의 새로운 이야기를 엮어가는 것 또한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이 아니고는 어렵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신비스러운 감정과 깊이있는 상상력속으로 빠질 수 있었다.
소원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가난한 자의 소원과 부자들의 소원..
이 책에서 그들의 소원은 부자인 성주의 부인에겐 일상일 수도 있는 일이고 가난한 유리장이의 부인에겐 꿈에서나 꿈꿔볼 수 있는 그런 일이다. 모든 사람들은 다 가슴속에 저마다의 소원을 간직하고 꿈을 키우며 살아가고 있다.
먼 미래를 설계할 때 그런 희망이라도 있어야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소원이 있고, 나의 아이들도 소원을 간직하고 있다. 종종 변해서 그렇지..^^
이 책은 선과 악의 대비가 극명하다.
나나와 플락사 밀트베터의 대립구조가 이야기의 마지막을 멋지게 장식하는데 이 책에서 맛보는 신비스런움의 극치가 아닐까..
반면에 꼭 신화에 바탕을 둔 이야기가 책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어쩌면 바로 우리 이웃의 이야기 같기도 하다.
소박한 꿈을 꾸고, 사랑을 간구하며, 원하는 바를 위해 정신없이 달려가는 것..
어쩌면 내 모습일 수도 있고, 가족, 혹은 이웃의 모습일 수 있다.
신비스런 느낌도 포함하고 있지만 신도 인간의 일이라 굳이 따로 구분지어 이야기할 건 없는 것 같다.
그리스 로마신화에서도 느꼈듯이 굳이 신과 인간을 경계를 그어 구분 하지 않더라도 마지막에선 그들의 일을 알아서 하고 인간은 인간대로 자신의 위치를 찾아가게 되는 것 같다.
우리에게 소원은 바로 눈 앞의 현실에서 많이 찾게 되는데 어쩌면 이러한 소원은 오래도록 생각해보고 나서 간절하게 빌어야 소중함을 더 느끼지 않을까 한다.
가끔 아이들이 내게 생일때, 혹은 어린이날에, 혹은 크리스마스에 뭔가를 요구해 오는데 아이들이 요구할때마다 즉시 소원을 들어주는 것도 어쩌면 우리가 아이들에게서 꿈을 빼앗아 오는 게 아닐까 싶다.
성주의 아내처럼 소원을 부모에게 빼앗기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성주 부부와 알베르트, 소피아부부도 대립되는 관계로 나오지만 굳이 이들을 대립관계 선상에 두고 싶지는 않다.
다시 온 세상을 아우르는 그런 좋은 관계로 삶은 돌고 도는 것이니까..
아이들이 다시 돌아오고 성주의 아내에게 소원이 생기고, 플락사 밀트배터가 배틀에 앉아 배를 짜고 현자가 밤과 낮, 과거와 미래를 볼 수 있는 상태로 돌아오듯이..
우리에게도 소원 한 가지씩 마음에만 간직할 수 있게 이룰 수 없는 꿈으로 남겨두자.
어쩌면 지금 당장 소원을 이루어버리는 것보다 훨씬 큰 가치로 우리에게 살아가는 힘을 줄 지도 모를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