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룡소 블르픽션:원더랜드 대모험 ]
작고 예쁜 책을 받아들고 환상적인 색채의 회전목마와 놀이기구가 그려져 있는걸 보면서 떠오른 것은 에버랜드였다. 첫 장에서 터지지 않는 불발탄이 폭죽이 아니라 최루탄임을 알고 나의 80년대 대학시절이 떠올라 잠시 하염없는 추억에 잠겨 보았던 책이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어울려, 아니 서로 어울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시대의 우울함 같은 것, 3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질 것 없는 우리 사회의 한 부분에 관한 이야기였다. 나도 아이들이 어렸을 때 제법 비싼 금액의 연간회원에 가입해서 몇 번 가 본적이 있는 놀이 공원의 개장행사에 관한 것이었다. 그 때도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는 겨우 회전목마나타고 아이들 대신 온종일 줄서주는 것이 전부였던 재미없는 추억들뿐이지만 우리 아이들에게는 꿈과 환상의 세계였을까? 어쩌면 꿈과 환상을 심어주기 위해 아이들을 데리고 다녔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지금도 그곳에 한 번 가기 위해 이토록 죽을 고생을 하는 아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주인공 승협이는 초등학교를 여섯 군데나 다녔다. 공장에서 일하는 가난한 부모님은 당연히 줘야할 돈과 휴가를 주지 않는 공장장들과의 투쟁에서 지고 쫓겨난 덕분에 늘 이사를 다녀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친구도 별로 없고 잘하는 것도 딱히 없는 덩치 큰 승협이는 눈에 거슬리는 녀석들과 투쟁을 하며 절대로 공장에는 다니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재미있는 건 다 비싸고, 이긴 사람만 기억하는’ 세상이지만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의 주인공은 기죽지 않고 씩씩하게 살아가려 안간힘 쓴다.
중학교 3학년 아이들에게 온갖 놀이기구는 물론 일 년 내내 축제와 공연을 보여준다는, ‘모험이 가득한 꿈의 세계’라는 원더랜드는 얼마나 큰 환상의 세계였을까? 더군다나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처음 생긴 곳이라면 말이다. 갈 수 없다고 생각할수록 가고 싶다는 마음은 무럭무럭 자라나는 원더랜드는 전철로 4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지만 승협에게는 미국보다 더 먼 곳에 있는 것만 같다.
어마어마하게 비싼 원더랜드 입장료를 마련할 길이 없는 승협이 갈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무료초청 이벤트에 당첨되는 것, 그러나 응모권이 있는 잡지책을 살 돈도 우표를 살 돈도 없는 가난한 현실이다. 현관이 승협이네 집 부엌만큼이나 넓은 부잣집 친구의 집에서 우연히 본 그 잡지책에서 응모권을 오려내 응모한 것이 당첨되는 행운을 얻게 된다. 단 하루만이라도 지긋지긋한 골목길과 단칸방에서 탈출할 수 있는 황금 같은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하지만 가난하고 약자인 사람들에게 거저 자선을 베풀어 줄 원더랜드 따위는 없다. 이벤트 진행 동안 죽을 것만 같은 무섭고도 힘든 시간들을 보내고 마침내 1등을 하지만 심장병을 앓고 있는 동생의 수술비로 쓸 상금 200만원은 주어지지 않는다. 대형 가전제품이나 백화점에서 사장님이 직접 골라왔다는 최고급 상품들을 가져간대도 좁디좁은 벌집의 단칸방에는 놓아둘 곳조차 없다. 승협이는 가난뱅이들과 부자들이 한 도시 안에 섞여 사는 풍경이 추하게 보였던 대통령의 ‘도시미관을 개선하고 빈민들을 수용하라’는 명령으로 지어진 벌집의 단칸방에 살기 때문이다.
우승자에게 주어진 많은 값비싼 선물들을 제쳐두고 결국 책을 좋아하고 학교에도 가지 못하는 동생을 위해 백과사전을 고르는 승협이 동생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느끼게 된다.
실은 이벤트 우승 상금으로 200만원을 준다고 한 사실이 없다. 너무나 절실하게 필요한 탓에 자신도 모르게 지레 짐작으로 믿어버린 것이고 실망도 그만큼 컸을 뿐이다.
“꿈에 그리던 상금 이백만원은 하늘 저편으로 훨훨 날아가 버렸다. 난 도대체 뭘 위해서 그토록 악에 받쳐 광대놀음 같은 경기에 몸을 던졌던 걸까.
하긴 그래. 울 엄마 말마따나 세상에 공짜는 없지. 원더랜드 천장을 물들이는 저녁노을을 올려다보며 나는 어서 빨리 집에나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p.221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벤트 회사측에서 우승자에게 장학금이나 수술비 명목으로 200만원쯤 주어도 되지 않을까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랬더라면 진정한 원더랜드가 될 수 도 있었을 것이다.
단지 하루 동안 공짜로 놀이기구 타고 재미있게 놀아보겠다는 중학생들을 상대로 재미와 흥행에만 열을 올리는 원더랜드 이벤트에 구경꾼들마저 합세해 열을 올린다. 잘 사는 사람들에겐 가난한 사람들의 절실한 소망마저도 구경거리가 되는 세상이다.
동생에게 줄 백과사전과 풍선을 들고 집에 돌아오자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아있지 않은 승협이.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삼년 째 아버지의 핀잔과 구박에도 멈추지 않고 일주일에 한번 씩 심장재단에 편지를 써 보내고 있는 엄마에게 드디어 수술비지원을 해준다는 편지가 왔다는 사실이다.
천만원의 수술비 중에서 80퍼센트를 지원해준다니 20퍼센트, 200만원만 있으면 당장 수술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200만원은 승엽이의 엄마 아빠가 거의 일 년 동안 공장 안 나가고 집에서 놀아도 되는 큰 돈이다. 승협이네 가족은 어떻게 수술비를 마련할지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원더랜드 행사 참가 기념품으로 받은 부채에 쓰여 있는 화려한 글씨 ‘꿈과 환상의 판타지 세상, 원더랜드’ 이제 승협이는 깨닫는다. 꿈과 환상이라는 건 내 손이 닿지 않는 곳, 내 세상 바깥에서 흘러가는 일들을 뜻하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어디로 어떻게 움직일지 종잡을 수 없는 원더랜드의 놀이기구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토록 가고자 원했던 원더랜드도 실은 별것 아니고 마법의 성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30여년 전의 시간과 장소가 무대이지만 오늘날에도 별반 달라지지 않은 우리의 현실을 보는 듯하다.
다섯 가지 이벤트가 진행되는 동안 독자들까지도 긴장되게 하는 흥미진진하고 결과가 궁금해져 멈추지 않고 단숨에 읽게 되는 내용이다. 공포의 해적선, 안드로메다 회전 원반, 고공 자유 낙하, 청룡열차와 보물선 대탐험 등 이름만 들어도 다리가 후들거리고 진땀이 나는 놀이 기구들이 생생하게 묘사된 장면들을 읽으면서 괜히 속이 울렁거렸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마치 원더랜드 대모험에 참가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재미와 함께 잔잔한 감동이 있는 원더랜드 대모험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장편소설이지만 어른들과 함께 읽고 우리 사회의 빈부격차와 재개발, 대기업의 이기심 등에 대해 생각해 보고 함께 나눌 이야기가 많은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