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똑같이 생긴 클론과 마주하게 된다면 어떨까? 유전자를 비롯해 외모와 취향까지 똑같은 복제 인간이 존재한다면 그에게 내 이름을 가져다 부칠 수 있을까? 나를 닮은 복제 인간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나와 같은 결정을 내리는 걸까? 과연 그런 일이 가능한 세상이 올 것인가?
불치병을 앓는 인간을 위해, 혹은 의학적, 과학적 논리로 생명이 복제되는 상황이 유쾌하지 않은 건 삶과 죽음을 주재하는 건 신의 영역이라 믿기 때문이다. 인간의 힘으로 생명을 창조하고 마음대로 폐기하는 세상이 온다면 영화같은 엄청난 일들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엘리지아’는 베타, 일명 시험판 클론이다. ‘루사디 박사’가 만든 청소년 제품군으로 완벽하게 만들어진 엘리지아는 세계에 둘도 없는 지상천국으로 불리는 ‘드메인 섬’의 ‘브래턴’ 부인에게 팔려간다. 브래턴 부인은 ‘애스트리드’가 떠난 자리를 엘리지아로 채우기 위해 그녀를 딸처럼 대하지만 어디까지나 엘리지아는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장난감에 불과하다. 봉사 기간이 끝나는 순간 폐기 처분되어 버려지는 운명을 타고난 클론… 과학의 힘으로 모체가 된 시조의 영혼을 추출했기 때문에 클론은 영혼이 없다. 기억도 없고 미각도 느낄 수 없지만 이식된 칩을 통해 인간의 감정과 표정을 흉내내며 기분을 맞춘다.
내 모체는 어떤 아이였을까?
멋지게 다이빙을 하던 엘리지아는 황금색 피부에 청록색 눈동자를 지닌 남자의 환영을 본다. 자신의 모체인 소녀가 사랑했던 남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혼란에 빠지게 된 엘리지아는 자신이 여느 클론과는 다르다는 걸 인식하게 되고 두려움에 빠진다.
‘타힐’을 만나지 않았다면 드메인에서 그저 인간이 시키는대로 인형처럼 사는 삶에 만족했을까? ‘잰스’가 그렇게 무참하게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만 않았어도 반란이라는 말을 입밖으로 꺼내는 일은 없었을까?
‘디펙트’는 자기도 영혼이 있다고 믿는 클론들이다. 해방을 꿈꾸며 인간처럼 느낄 수도 있고 분노하기 때문에 발견 즉시 반품 처리가 되어 폐기 처분된다. 눈알이 빠지거나 손발이 묶인채로 피부가 벗겨져 화학실험의 대상이 되면서…
자신이 디펙트라는 사실을 알게 된 엘리지아는 두렵지만 당당하다. 자유를 꿈꾸게 된 디펙트는 만들어진 낙원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망을 꿈꾸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다. 게다가 타힐이 말한대로 10대 베타들이 겪는 반항기에 이르러 성인이 되기도 전에 광기에 사로잡혀 사라질까봐 무섭다.
죽더라도 누군가의 소유물이 아니라 나 자신으로 살고 싶어…
권력자들은 완벽한 아타락시아로 불리는 드메인에서 과학의 힘으로 공기와 파도의 높이까지 조절하며 클론들을 노예처럼 부리고 산다. 심지어 클론들을 겁탈하고 성노리개로 취급하지만 인간이 아니기에 인권이 없는 클론은 묵묵히 그들의 운명을 받아들일 뿐이다. 생각을 가지고 거부하는 순간 클론은 디펙트로 분류되어 폐기처분 될테니까… 복제인간 권리 위원회의 보고서 작성을 위해 아퀸 족 ‘알렉산더’가 파견되지만 진실은 묻혀 버리고 엘리지아는 자신을 망쳐버린 인간들에게 복수를 꿈꾼다. 디펙트 비밀 결사대가 될거야.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불완전한데 그들이 만들어낸 존재가 완벽할리 있을까? 게다가 영혼이 없다는 이유로 클론들을 장난감처럼 취급하고 마음대로 죽이는 모습은 끔찍하기 짝이 없다. 인간의 욕망은 늘 이처럼 쾌락을 쫒고 누군가의 일방적인 희생과 고통을 강요하는 것일까? 스스로 화를 자처하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불완전함에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총 4부작으로 구성된 작품의 첫번째 주자인 <베타>는 SF 로맨스 소설로 복제 인간 엘리지아를 통해 인간의 욕망과 쾌락에 예리한 칼날을 들이민다. 첨단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범한 오류는 없는지, 욕망을 위해서라면 양심을 깨우는 목소리에 모른 척해도 좋은지에 관해 묻는다. 당신은 당신의 욕망에서 자유로운가?….
사춘기의 반항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길임을 깨닫는 클론을 보며 아들의 반항에 조금은 너그러워지자고 마음 먹어본다. 짧은 시간 너무나 많은 것들을 겪은 엘리지아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그녀와 함께 기꺼이 운명을 개척해갈 준비가 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