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존 스티븐스
10여년전 <해리포터>로 시작된 환타지의 열풍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는것 같다. 끊임없이 책이 나오고, 영화로 만들어지는 작업들이 계속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리고 대상 독자들도 다양해지고 있는 것 같다. <트와일라잇>시리즈의 수준은 초등학교 도서관에서 비치를 할것인가 말것인가를 고민하게 만든다.
그동안의 여러 환타지 시리즈를 거치면서 만나게 된 <파이어 크로니클>
책을 잡고 이틀만에 읽어 버릴 정도로 (두께 장난아님 – 623쪽) 빠져 들은 책이다.
사실 전작<에메랄드 아틀라스>를 읽지 않아 감을 못잡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중간중간 작가의 친절한 설명으로 쉽게 읽어 내려갈수 있었다.
전설 처럼 전해 내려오는 시원의 책 세권. 라코티스라는 이집트의 한 도시에서 마법사들이 이 지키고 있었지만 이천오백년전 다이어 매그너스의 속삭임으로 알렉산더 대왕이 도시를 침략하자 책은 감쪽같이 사라진다. 다이어 매그너스는 이 책을 모아 위대한 힘을 얻어 마법의 제국을 세우려 하고, 그 과정에서 10여년전 케이트, 마이클, 엠마 세남매의 부모님은 붙잡혀 가게 된다. 그뒤 고아원을 전전한 삼남매는 그 시원의 책을 찾게 되는 운명의 아이들이 자신이라는 것을 조금씩 알게되고, 스태니슬라우스 핌 박사와 가브리엘의 도움으로 모험을 떠난다. 전편에서는 아틀라스 라는 시간의 책을 찾게 되고, 그 책의 주인인 케이트는 조금씩 책을 통한 마법으로 시간을 다스릴수 있게 된다.
이번 편에서는 케이트는 과거 속에서, 마이클과 엠마는 현재에서 악과 맞서 싸운다. 다른 이들의 도움도 받고, 속임수에 속기도 하고, 어려운 선택을 하면서 결국 또 한권의 책 크로니클을 찾게 되지만, 과연 책 세권을 다 찾아 한곳에 모으면 삼남매는 살게 되고, 부모님은 돌아오시고, 다이어 매그너스는 죽게 될까? 책이 모두 모아지면 삼남매가 죽게 될 거라는 모호한 암시는 우리들에게 궁금증을 불러 일으킨다. 그 와중에 엠마는 마법으로 변신한 매그너스의 부하에 의해 사라지게 되는 것이 이 책의 결말이다.
크로니클 이란 책은 생명의 책으로 마이클이 주인이 되는데, 그책에 이름을 쓰면 이름의 주인이 다시 살아나거나 치유가 되는 마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마이클이 누군가의 이름을 그 책에 적으면 마이클은 그의 삶 전체를 마음으로 경험하게 되고, 그의 희노애락의 모든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런 과정이 결코 쉽지 않기에 마이클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마법에도 댓가가 따르는 것 처럼… 그래서 크로니크를 통한 마이클의 참된 성장이 이 이야기의 주제이기도 하다. 아마 다음책은 엠마의 이야기가 주로 나올 듯 하다.
이 책은 쉽게 읽히지만 결코 단순한 사건 나열은 아니다.
마이클이 다이어 매그너스를 살려내는 과정 속에서 절대 악이지만 그가 겪은 모든 삶을 가슴으로 이해하게 되고, 자신도 그런 분노와 증오를 순간 갖게 되는 사건은 어린이도서 에서는 보기 힘든 깊은 심리적상황이다. 그러기에 청소년이 보아도, 어른이 보아도 공감할 수 있는 책이다.
특히 이 책에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사건의 인과 관계가 꼬이게 만든것은 환타지소설의 발전된 모습이라고 생각할수 있을 것 같다.
시간의 책 아틀라스에 의해 케이트는 100년전으로 오게되고, 거기서 다이어 매그너스의 다음 후계자인 라피를 만나게 된다. 아직 그는 자신이 후계자 라는 것을 인식 하지 못한 상태라 라피가 올바른 선택을 하게 하기 위해 케이트가 온 것이지만, 결국엔 케이트의 죽음으로 인해 라피는 다이어 매그너스의 요청을 받아 들이게 되고, 이것이 전작에서 그들이 만나게 되는 전초전이 되었다. 그렇다면 케이트가 오지 않았다면, 라피는 새로운 다이어 매그너스가 되지 않았을까? 책에서는 아니라고 말한다. 점을 치는 소년은 케이트가 아니었으면 라피가 임프와 한편이 되었을거라고 말한다. 그러면 라피가 다이어 매그너스가 되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바뀔 수 없는 운명이었을까? 읽는 이로 하여금 호기심을 자극 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이 책에서는 주인공들의 선택의 문제가 많이 부각된다. 번역자도 이 점을 높이 사 아이들이 이 책을 읽고 그런 면에서 토론을 하면 좋을 것이라고 권하고 있다.
또 한가지, 무엇보다 다른 환타지물에 비해 시각적인 표현이 뛰어난 점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책장을 넘겨가며 눈에 펼쳐지는 장면은 그대로 영상을 옮긴듯 눈앞에 그려졌고, 섬세하면서도 세밀한 표현들은 내가 마치 영화를 찍어내고 있는듯한 기분이 들도록 만들었다.
예를 들어 스태니슬라우스 핌 박사를 묘사한 부분을 보면,
사내는 키가 크고 비쩍 마른데다 허연 머리칼이 제멋대로 헝클어져 있었다. 추레한 트위드 양복에 진녹색 넥타이를 맨 몰골은 마치 불난 집에서 갓 도망 나온 사람 같았다. 재킷 호주머니 밖으로 비죽 튀어나온 담뱃대도 낡고 오래되어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거북 등딱지로 만든 안경테는 다리가 휘어지고 곳곳에 이어붙인 자국까지 있었다. (p.44-45)
누가 읽더라도 그의 모습을 쉽게 상상할수 있고, 아마도 그릴 수도 있을것 같다.
방송작가로서의 경험이 생생한 묘사를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의 묘사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마치 등장인물의 행동방식도 연기지도 하듯 표현을 한다.
마법사는 겹겹이 쌓인 두툼한 패스트리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순간 패스트리 안에 든 크림이 그의 넥타이 위로 똑 떨어졌다. 마법사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냅킨을 찾았다.(사실 냅킨은 그의 바로 앞에 놓여 있었다.) 그러다가 냅킨이 금세 눈에 띄지 않자 손가락으로 크림을 쓱 훔쳐서 입으로 가져갔다. (p.57)
한편의 시나리오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그러기에 책장은 술술 넘어가고, 사건은 박진감 넘치게 진행이 되고, 책을 한번 잡으면 놓을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저자의 능력이 뛰어난 걸까? 번역자의 능력이 뛰어난 걸까?
환타지 소설은 대부분 우리가 실제로 보고 경험한 것들을 그린것이 아니기에 묘사가 떨어지면 책을 읽으며 감을 잡을 수 없을때도 많다. 전의 여러 책들이 그러했다. 나는 <트와일라잇>을 읽으면서는 (뒤 시리즈로 갈수록 점점) 중요한 줄거리만 읽고 대충대충 넘어갈때가 많았다. 특히 싸우는 장면에서는 왼쪽으로 넘어가서 어디에 부딪히고, 다시 반격하여 어느쪽을 맞받아 치고… 이렇게 설명되어 지는 부분이 전혀 상상이 가지않게 서술되어 있을때가 많았다. 그래서 그냥 넘어가며 읽는거다. 누가 이겼냐만 확인하고…
하지만 <파이어 크로니클>은 그렇지 않았다. 장면 장면 하나 하나가 눈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화산에서 싸우는 장면도, 마이클과 엠마가 꽥꽥이를 피해 벽을 기어오르는 장면도 지금도 생생하게 그려진다.
작가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난 번역자의 뛰어난 실력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흔히 어순이 다른 영어를 번역하다 보면 쓸데없이 문장의 길이가 길어져 본래의 주어와 서술어가 맞지 않을때가 많은데, 이 책은 간결한 문장체로 무리한 오역이 없는 것 같았다. 매끄러웠다.
책을 덮고 나서도 마치 영화 한편을 보듯한 생생하고 재미있는 책, 벌써부터 다음 책이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