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의 제왕』속 가장 아름다운 요정, 숲의 여왕의 이름이 갈라드리엘이다. 이 이름을 쓰고 있는 어린 소녀를 만났다. 갈라드리엘 홉킨스라는 근사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 소녀는 참 당찬 아이다. 갈라드리엘 홉킨스라는 이름보다는 질리 홉킨스라는 이름을 좋아하고, 자신의 생각을 어른보다도 더 똑 부러지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아이다. 어른들의 시선으로는 영약함이 넘쳐 선생님을 골려먹는것도 도가 튼 아이다. 자신이 머리가 좋은 것도 알고 있기에 다른 아이들보다 열심히 공부를 하다가도 선생님의 황당함을 보고싶다는 이유로 공부의 손을 딱 놓아버리는 아이. 게다가 이 아이는 지금 세번째 위탁모인 트로터 아줌마와 함께 해야한다. 질리의 눈에 트로터 아줌마네 집은 악의 소굴이다. 먼지투성이에 움직이기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는 아줌마는 하마같고 함께 사는 윌리엄 어니스트는 장애가 있다. 그뿐인가? 옆집에 살고 있는 랜돌프 아저씨는 장님에 흑인다. 이들을 이제 질리가 돌봐야 할것만 같다. 어떻게 이런 사람들하고 함께 할 수 있겠는가?
분명 질리에 엄마는 이유가 있을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사진 속 너무나 아름다운 엄마가 아직까지 자신을 찾으러 오지 않을리가 없을테니까 말이다. 엄마가 세 살 밖에 안 된 질리를 버리고 잠취를 감췄다고 말들을 하지만 분명 이유가 있을것이다. 엄마의 부재와 함께 시작된 질리의 ‘위탁인생’. 하지만 질리는 괜찮다. 누구에게도 주눅들지 않고 움츠러들지도 않은 ‘위풍당당’한 질리니까 말이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는게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는 딕슨 가족이 쓰레기와 함께 질리를 버려두고 간 순간 이미 알아버렸다. 질리가 자신을 꽁꽁 숨겨둔 이유는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이는 두려움을 숨기기 위해 강한 아이처럼 보이기 위해 이렇게 말을 한다.
“저는 집 바꾸는 거 좋아해요. 한 집에 계속 있으면 심심하잖아요.” (p.20)
엄마에게 서 온 엽서 장. 그 속에 적혀져 있는 주소로 찾아가기 위해선 돈이 필요했다. 눈도 안보이는 랜돌프 아저씨 집에서 돈을 찾은건 우연이었고, 엄마에게 가기엔 턱없이 부족한 돈은 트로터 아줌마가 아무렇게나 둔 돈에 손을 델수 밖에 없었다. 질리에게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어린아이가 혼자 여행을 하는걸 그냥 보고 있는 사회는 제대로 된 사회가 아님을 증명하듯 질리는 다시 트로터 아줌마에게 돌아온다. 그러면서 트로터 아줌마가 질리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깨닫게 된다. 인생은 어른들에게만 고난으로 다가오는것은 아니다. 요즘 자주 쓰는 말 중에 ‘꽃길만 걷게 하고 싶다’라는 말이 있지만, 어느 누구도 삶을 살아가면서 꽃길만 걸을 수는 없다. 고난 없은 인생이 어디 있을까? 이제 서로 마음을 함께 한다고 여기는 순간 예기치 못한 사건은 따라온다. 외할머니의 등장처럼 말이다.
질리의 편지 한통이 만들어낸 파장. 질리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놀랄일이 생기면서 질리는 컴퓨터의 버퍼링이 생긴것처럼 버벅거리기 시작한다. 상상 속 엄마의 모습은 현실에서 마주한 엄마가 아니었다. 위풍당당한 질리에게는 여왕처럼 아름다운 엄마가 당연하고 그런 엄마의 엄마라는 다른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절대로 절대로 질리를 보내지 않겠다던 트로터 아줌마도 양육권을 주장하는 가족을 이길수는 없다. 그게 당연한 것이고 순리니까 말이다. 삶은 살아가는 거다. 어른이나 아이나 살아내야 한다. 그 삶을 어떻게 살아낼지는 본인이 결정해야 하는 문제다. 이렇게 어린 소녀가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것이 어쩌면 너무나 억울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다른 아이들처럼 어른이 도움을 주는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하지만 질리는 다른 이들보다 조금 일찍 알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미운 오리가 아닌 숲의 여왕 갈라드리엘 홉킨스가 되기 위한 한걸음을 이렇게 위풍당당하게 내딛으면서 말이다.
‘위탁’이 아닌 진짜가 되는 것. 어딘가에 속하고 누군가를 갖는 것. 진정한 자신이 되는 것. 미운 오리 새끼가 아닌 백조가 되는 것. 변장을 벗어던진 골풀 모자가 되는 것. 신발을 찾은 신데렐라가 되는 것. 왕자님을 만난 백설 공주가 되는 것. 진정한 갈라드리엘 홉킨스가 되는 것. (p.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