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쿵쿵. 쓰윽 쓰윽.
또 시작이다. 윗층에 사는 꼬마의 놀이 시간인가보다. 오며가며 몇 번 얼굴을 본 아이지만 별로 아는 척을 해 본적은 없다. 몇 번 주의를 주라는 남편의 말에 도리어 남편을 달랜다. 우리 집에 수험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이 든 어르신네만 사는 집도 아닌데 왠만하면 참고 지내자고 말이다. 아이를 키워본 부모로서 그 정도는 이해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에서 였다. 태어나서부터 늘 아파트에 살아 온 우리 아이들은 늘 뛰지말라는 말을 귀에 달고 살았다. 여자 아이들이라 뛰어봐야 그리 소란스럽지도 않았겠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한다는 생각에, 때론 유난스런운 이웃 때문에 거의 노이로제처럼 아이들은 주의 시켰다. 그러느라 아이들의 발걸음은 늘 까치발이었다. 뛰어도 발뒤꿈치를 살짝 들고 총총거려야 했다. 그랬기에 조금은 이해해 주면서 살고 싶었다.
비좁은 집에 살던 그들이 이사를 왔다. 햇빛 쏟아져 들어오는 넓직한 방을 돌아다니며 새집을 즐기던 그들에게 난데없은 초인종이 흥을 깬다. 다짜고짜 소리부터 질러대는 아래층 할머니는 이들 가족에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후로 그 가족의 삶은 아래층 할머니와의 전쟁이었다. 커다란 빗자루로 천정을 찌르고 있는 할머니의 그림자를 보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한참 전에 우리 남편도 똑같은 짓을 해 천정 벽지를 찢어놓은 기억이 나서였다.
아래층 할머니가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돌아간 날이면 엄마 아빠는 너무도 속상해 하신다. 그런 부모님의 보고 있는 아이들의 마음도 편치만은 않다. 결국 아이들은 생쥐처럼 기어다니기에 이른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는 나도 맘이 상한다. 너무도 예민한 이웃을 만나 피아노 연습도 제대로 못하던 때가 생각나서였다. 아파트의 생리를 이해하지 못하던 그 이웃의 이사로 전쟁은 일단락 되었지만 결코 돌아보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잘 먹지도 놀지도 않는 아이는 이미 아이가 아니었다. 어른들의 걱정에도 아이들은 용기를 내지 못하고 허공에 발차기를 한다. 같이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입장에서 너무 슬프고 가슴이 아팠다.
한편 아래층 할머니는 이런 변화가 이상하다. 아이들의 발소리도 웃음 소리도 들리지 않자 할머니는 자신의 귀에 이상이 생긴 줄 알고 병원까지 다녀온다. 궁금증을 견디지 못한 할머니를 의자를 한 개 두 개 가져다 놓고 귀를 쫑긋 세운다. 더 높이 더 높이 쌓아올린 의자만큼 할머니의 귀도 조금씩 커져갔다. 소리를 들으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할머니의 귀는 커졌다. 의사의 처방은 명쾌했다. 못들어서 생긴 병이니 듣게 만들면 고쳐지는 당연한 처방전이었다. 하지만 그 치료법은 꼭 위층 가족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할머니가 쫑긋 귀를 세우지 않아도 좋을 만큼의 소리를 들은 할머니의 귀는 조금씩 작아져갔다. 물론 위층 가족들의 병도 고쳐졌을 것이다. 움직임이 늘어난 아이들은 잘 먹게 되었을 것이고 네 발로 기어다니는 생쥐에서 해맑은 웃음 소리의 아이들로 돌아왔을 것이다. 이제 아래층 할머니와 위층 아이들은 반갑게 인사를 주고 받는다.
이야기가 해피엔딩으로 끝나 다행이다. 요즘은 내 가족의 이기심만을 내세워 내 아이 기죽이지 않는 일이 예의보다 앞서 이웃끼리 못 볼 구경거리까지 만든다는 이야기를 간간이 듣게 된다. 서로에 대한 예의를 지켜주면 나도 너도 마음을 열 매듭을 푼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아이들도 한두번씩은 경험해 봤던 일이라 너무 재미있게 보았다. 특히 늘어진 할머니의 귀를 보며 어찌나 웃어대던지. 자신들이 당했던 마음을 달래주는 그림이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들어 함께 웃었다. 아이들과 함께 사는 법을 이야기해 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을 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