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에게 비룡소 그림책 시리즈를 읽어주다 만나게 된 책이다. 글이 길고 건조해서 아이들은 통 재미를 못 느끼는 눈치였지만 내게는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었다. 표지를 보게 되면 드는 한없이 귀여운 토끼들의 흥미진진한 모험담일거라는 짐작은 첫 장을 여는 순간부터 깨지게 되었다.
토끼들이 집단 사육되는 공장. 그 안에 있는 토끼는 물론 이름도 없다. 새로이 잡혀온 갈색토끼는 비좁은 우리 안의 삶을 받아들일 수 없다. 막연한 불안감을 가진 채 사육되고 있던 회색토끼도 갈색토끼와 탈출하게 된다. 이들 앞엔 멋진 모험이란 없다. 오직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있을 뿐.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지만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것조차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생활. 이 상황을 회색토끼는 견뎌내기 어려웠다. 사육되거나 구조되어 인간의 보호를 받던 야생조수들이 자연으로 방사하면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다. 안락함이란 유혹을 떨쳐내기는 이다지도 어려운가 보다. 그러나 보장된 안락함이란 그본성을 잃게 만들고 이들의 미래까지 바꿔 놓는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회색토끼는 공장으로 돌아가면 도살될 것이란 것을. 그래서 돌아가는 행위가 자살행위로 보이는 것이다. 반대로 회색토끼 입장에서는 야생에서의 삶이 자살행위로 생각될 것이다. 약간은 불편하지만 안락한 생활로의 복귀는 선택의 여지 없는 것이다.
우리도 항상 선택의 기로에 선다. 치명적인 결과를 안다면 그 쪽으로 가진 않을 것이다. 그래서 미리 예측해보려 혈안이 되지만 이 또한 쉽지 않다. 눈앞의 안락함을 누가 쉽게 뿌리칠 수 있을까? 나는 바보 같은 회색토끼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회색토끼는 참 바보같애 라고 결론을 내리면 되는 것일까?
갈색토끼의 입장에선 그는 처음부터 야생에서 생활해 왔기에 공장에서의 삶이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야생에서 살면서 매일 끼니를 걱정하고 맹수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 혹 회색토끼보다 먼저 맹수의 밥이 되거나 굶어 죽거나 동사할 수도 있다. 비참하게 끝날 수도 있는 생이다. 회색토끼가 아니라 갈색토끼가 현명해 라고 쉽게 결론지을 수도 없다.
어떤 삶이건 완벽하게 행복하거나 불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름의 즐거움이 있고 어려움이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고르라고 한다면 갈색토끼의 삶을 택하고 싶다. 왜냐, 그게 토끼다우니까. 인간답다는 것도 바로 그런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