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내가 10여년 전에 지금은 대학생이 된 연이가 초등학교 때 이 동화를 만나지 못했이 너무나 아쉽고 안타깝다.
그랬다면, 만약 그랬다면 지금 연이는 훨씬 그 어둠의 공포를 잘 극복했을지도 모를텐데 말이다.
연이는 일곱 살 무렵 엄마를 백혈암으로 잃었다.
나는 죽음의 공포가 아이에게 어떻게 머무는 지를 몰랐다.
그 아이가 내게 글쓰기를 배우러 온 것이 초등학교 5학년 무렵이었고 겉으로 너무나 예쁘기만 아이의 마음 속은 온통 어둠의 공포로 난장판이었다.
밤이면 벽마다 어둠이 고여 흘러내리고, 침대 위로 얼굴도 못내밀 정도로 어둠의 공포에 시달려온 아이는 지쳐가고 있있다.
이 동화흫 읽으면서 세상에 어떻게 이토록 그 아이가 했던 말과 똑같이 어둠의 정경이 묘사되어 있을 수 있는가 싶어 전율이 일었다.
그 때 나는 뭐라 해야 할지 몰라 내가 아는 온갖 동화를 끌어다대어 보아도 아이에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음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할 수 있다.
아이에게 죽음의 공포보다 홀로 빈 방에 , 어둠 속에 놓여진다는 것이 얼마나 끔직한 고통이었는지 짐작은 가나, 수 많은 말로 그것은 허상임을 설명은 하였으나 그게 아이에게 가서 닿지 못했다.
이렇게 어둠과 친구가 되는 방법도 있었는데 이 동화책을 그 아이가 그 때 읽을 수 있었다면 어둠을 친구로 만들었을 수도 있을텐데 ……
내가 전해 들은 소식으로는 그 아이는 아직 어둠의 빈 방에 고인, 그 어둠의 공포를 극복해 내지 못한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 동화를 그 아이에게 들려주려 한다.
그 아이의 어둠이 친구가 되길 진정으로 기원한다.
동화는 성처받은 모든 영혼에게 하나뿐인 치료제 임을 나는 아직도 굳게 믿는다.
민이는 어둠의 공포는 잘 모른다.
그 대신 마음에 어둠의 빈 방이 있는 듯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혼자 빈방에 버려지는 것일게다.
성치 않는 몸으로 세상을 헤쳐나가야 하는 민이의 세월은 고단할 것이다.
어둠과 같은 세상의 편견과 홀로 싸워야 하는 민이는 이 세상의 어둠을 이렇게 친구로 만들어 버리는 지혜를 가질 수 있도록 나는 이 동화를 두 번째로 민이에게 들려주려 한다.
어둠과 친구가 되고 나면 이 세상의 무엇이 민이를 고단하게 할 수 있겠는가?
며칠 전 내가 아는 착한 할아버지가 갑자기 할머니를 잃었다.
통곡하는 할아버지는 사람이 사람을 ,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부부로 살다가는 게 무엇인지를 보여주셨다.
할아버지는 정성을 다해 할머니를 저 세상으로 배웅해 주셨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안 계신 세상은 너무 어둡다고 하셨다.
어둠의 공포가 할아버지의 정신을 앗아간 듯 했다.
나를 빈 방에, 어둠의 빈 방에 두지 말아 달라고 할아버지가 우셨다.
이 착한 할아버지께 어둠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감히 이 동화를 읽어드리면 안될까.
나는 그림자 동물을 찬찬히 읽고 또 읽는다.
어둠과 친해지다는 것의 의미는 참으로 깊고도 넓다.
나는 죽음의 공포가 강처럼 출렁이는 중환자실에 대한 경험이 많은 사람이다.
거기에 고여 있는 어둠의 공포, 죽음의 공포를 친구로 만드는 비법을 이 동화에서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