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무늬 잠옷을 입은 어린 소녀가 달빛 아래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있군요. 별도 달도 잠든 이 밤 소녀를 잠 못 들게 한 그이는 누구란 말인가요. 저리도 진지한 모습에 차마 말을 걸 수는 없습니다. 세 살 짜리 아기에게도 자기만의 세계는 있는 법. 고요를 방해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그렇죠. 표지를 살짝 들춰봅시다.
어머, 저게 뭔가요. 저 대단한 크기의 꼬리라니. 고 … 고래 인가요. 고래가 분명 맞는거죠? 바다에 있어야 할 고래가 왜 저 곳에 있을까요. 사람이 만들어 놓은 인공 연못 속에서 첨벙대고 있는 모습이 힘들어 보입니다. 빨리 야생동물구호단체에 전화를 걸어 바다로 고래를 돌려보내야 하는데, 에밀리는 저의 마음과는 달리 왠지 무심한 듯 보입니다만 .. 아, 아니군요. 편지를 쓰고 있군요. 연못에서 발견한 고래에 대해, 삐뚤빼뚤하지만 나름 고래를 염려스러워하는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수취인이 「그린피스」입니다. 그린피스!! 기껏해야 일곱여덟살 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소녀가 그린피스를 알고 있군요. 여러분들은 그린피스를 알고 계시나요. 세계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환경 보호 단체가 바로 그린피스랍니다. 회원 수만 해도 300만 명이 넘고 2005년도에는 울산포경에 반대코자 우리나라를 방문한 적도 있어요. 자, 이쯤해서 그린피스에 대해선 접고 에밀리가 받은 그린피스의 답장이나 읽으러 가봅시다.
이런, 고래를 아주 아주 사랑하는 에밀리가 실망하겠는걸요. 제 눈에도 에밀리 집 연못에서 꼬리를 첨벙대던 동물은 고래가 확실히 맞는데, 왜 믿어주시지 않으시나요. 환경지킴이 그린피스!!
그린피스의 일축에도 불구하고 또 편지를 써서 보내는 에밀리. 아, 저는 근래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를 본 적이 없습니다. 짠물에 살아야 하는 고래의 건강이 염려스러워 연못에 소금을 뿌려주다니요!!
그린피스는 에밀리를 엉뚱한 생각만 하는 아이라고 생각하고 있나봐요. 에밀리 집 연못엔 절대 고래가 있을 리 없다고 단정시켜 버리는 답장을 다시 보내고야 말았지 뭡니까. 계단 아래에 앉아 그린피스의 답장을 읽고 있는 에밀리의 어깨가 힘 없어 보이는 건 저만의 생각인가요.
에밀리는 또 그린피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연못 위로 뛰어오른 고래에 대해, 기운을 차린 고래가 기특해서 맛난 걸 먹여주고 싶나 봐요. 먹잇감을 가르쳐 달라고 하는군요. 그런데 에밀리, 이 아이는 왜 이렇게 예의가 바른 겁니까. ‘그린피스에서 일하는 멋진 분들께’ ‘그린피스에서 계신 용감하고 멋진 분들께’ ‘환경을 위해서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는 그린피스께’. 사랑이 담긴 경외감으로 가득합니다.
드러내놓고 에밀리가 정말!엉뚱하다 하는 그린피스. 연못의 꼬리 달린 동물은 파란색 금붕어일거라고 답장을 보냈군요. 에밀리가 실망했을리 있나요. 콘플레이크 부스러기와 빵 조각을 투정없이 먹어 준 고래가 대견하고 ‘아서’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편지를 써서 보냅니다.
그린피스, 에밀리의 편지공세에 종지부를 찍어야 겠다고 작심했나봅니다. 고래는 한 곳에 머물며 살지 못하는 이동성 동물이라, 절대! 연못에선 살 수 없다는 답장을 보냅니다. 그 밤, 고래는 연못을 떠나고 에밀리는 정체성을 깨달은 고래를 다행스러워하는 한편 그립다며 그린피스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그린피스, 잠시만 얄미워할게요.
에밀리와 고래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세상 모든 것엔 본연의 자리가 있듯 에밀리는 다시 학교를 열심히 다니고 고래는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 이동성 동물이 되어 바다 속에서 자유로울 겁니다.
천적들의 공격과 배고픔에서 벗어난다해서 철창 속의 동물들이 인간에게 감사함을 과연 느낄까요. 하루 종일 게슴츠레한 눈으로 사람들이 던져주는 먹이감에만 몰두하는 매일매일이 행복할까요. 인간의 욕심과 미움으로 인해 지금 이 시간에도 많은 동물들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 곁을 떠나 돌아오지 않은 생명들이 많아질 수록 우리의 미래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무관심은 이기심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아! 저것 좀 보세요. 바다와 육지의 경계에서 행복해하는 에밀리와 고래의 모습을. 정말 행복해 보입니다.
영국 작가 사이먼 제임스가 쓰고 「거꾸로 읽는 그리스로마신화」의 유시주씨가 번역한 이 책은 고래에 대한 기초적인 상식과 세계적인 환경 보호 단체 그린피스에 대해서도 알 수 있는 어린이를 위한 지식교양서입니다. 그린피스의 허락을 정식으로 받아 그린피스의 이름을 사용했고 재생 용지에 인쇄했기에 의미 또한 높게 사고 싶습니다. 편지체 형식을 사용하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1학년 어린이가 직접 에밀리의 편지를 썼기에 설득력과 친화력이 높죠. 본문에서 다하지 못한 고래와 그린피스에 대한 부록은 지구와 그 지구가 품은 생물체에 관한 인식을 새롭게 합니다.
어른과는 기본적으로 의식세계가 다른 아이에게 어찌 그리 융통성 없고 권위스럽기만한지 민망하고 답답하기도 했지만 사이먼 제임스는 소통불가능한 이 두 단절된 세계를 오히려 역이용해서 재미와 지식을 추구했고 성공했습니다. 현실과 판타지속에 지식이 잘 버무려져 있죠. 서로에게 잠식당하지 않고 묵묵히 할 말 다하는 에밀리와 그린피스의 입말들, 즐겁지 않으십니까. ⓒ김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