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아픔이 곳곳에 묻어나 지난 여름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았을 때 느꼈던
슬프고 아픈 기억들이 문득 문득 되살아났다. 그 역사 속 한 페이지 어딘가에 나도
있었지만 어리기도 하고, 그 곳에 있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역사 속 아픔을 다 알지
못하지만 민주화를 부르짖던 그 페이지 한 켠에 존재했다는 이유만으로 함께
분개하고, 최루탄의 매캐한 냄새를 맡으며, 눈물과 콧물이 뒤범벅되어 쫓기던
나의 젊은 시절로 다시 되돌아간 기분이였다.
책을 읽으면 보통 나도 주인공과 어느새 한 몸이 되어, 내가 주인공이 되어
모험의 주축이 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어느새, 준호가 되어 이 여행의
흥분에 함께 들떠있었다.
규환이가 갑자기 다치는 바람에 이 엄청난 모험을 대신하게 되었을 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았었다. 준호가 9살 때 아빠는 집을 나갔고, 6년이란 시간이 흘렀건만
아빠는 돌아오지 않는다. 엄마는 재혼을 하여 지금 신혼여행중이다.
나라도 이런 상황에서 규환이 대신 시작하게 된 여행에 설레였을 것이다.
그것이 운동권으로 지명수배된 규환이 형에게 외국으로 망명가게 도와줄 서류를
갖다주러 가는 길이라 해도 말이다.
단지 기분전환으로 이 상황에서 벗어나 규환이 형에게 서류만 갖다 주면 되는 그런
기분좋은 여행이 될 거라 생각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준호는 규환이 대신 승주네 주조장 트럭을 타고 광주까지, 거기서 기차타고,
버스타고, 배타고 신안 임자도의 전장 포구에 산다는 하영진이라는 사람을 찾아가는
여행을 시작하려고 한다. 하지만 네 명, 아니 정확하게 초대하지 않은 세 명과 한 마리의
사냥개가 불청객으로 이 여행에 동행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계획에도, 상상에도 없던
동행이였다. 이제는 여행이 아니였다. 여행은 늘 계획했던 대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예측하지 못한 여러가지 일들이 일어난다. 마치 고행길이 따로 없다.
Y읍 절반의 땅을 소유한 주조장의 외아들로 남부러울 게 없을 것 같은 승주는 부모의
커다란 기대가 부담스럽다. 지금도 엄마가 보낸 절에서 도망을 쳐서 준호와 한 트럭을
탄 것이다. 어쩌면 일행이 모두 마음 둘 곳을 찾아 여행을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정아는 아버지의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망을 쳤고, 할아버지 또한 정신병원에서
탈주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고… 그렇게 그들은 원치 않은 동행이 되어 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가는 길에 트럭에서 쫓겨나 광주까지…그리고 무안으로… 임자도로 걸어가게
된다. 행군이 따로 없다. 들짐승에게는 꼼짝도 못하지만 아무에게나 짖고, 덤벼드는
사냥개, 루즈벨트를 데리고 그들은 걸어서 걸어서 목적지를 향해가고 있었다.
죽을 고비도 넘기고, 경찰의 눈을 피해 가는동안, 그들은 서로의 상처를 내 보였고,
서로의 아픔을 공유해 가며 그들은 어느새 서로를 이해하며 우정을 쌓아가게 된다.
서로의 아픔을 다독이며 15살의 여름을 그렇게 뜨겁게 보냈다.
저마다의 상처를 안고 여행을 시작한 그들은 서로 다독였고 아픔을 감싸주며 그렇게
한층 성숙되어 다시 그들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그렇게 원하지 않은, 어쩔수
없는 여행을 시작했지만 그것이 그들을 더욱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나 또한
86년, 15살의 준호처럼 비슷한 시대를 살았기에… 시대를 묘사하는 아픈 현실을 통해
그 시대로 돌아간 것 같았고, 그 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하고 내 성장기의
추억의 한장을 들추어보았다.
나도 준호처럼 22년이 흘러 그 때로 다시 돌아간 듯 하였고, 나는 이처럼 격정적인
모험이야기는 없었지만 준호의 험난하고 고생스런 여행 이야기를 통해 나의 일처럼
재미있게 읽어나갔다. 모처럼 재미있는 소설에 밤 깊은 줄 모르고 책을 놓지 못하고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