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룡소 책 시사회에 당첨이 되어 받았다.
두꺼운 책일 줄 알았는데 받아보니 양장본이라서 그렇지 90여쪽의 중편 정도의 책이다.
목판화로 작업한 삽화는 무쇠인간을 표현하기에 적절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림작가 앤드류 데이비슨은 『무쇠인간』으로 1985년 독일의 쿠르트 마슐러 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겉표지를 넘겨보면 속표지에 제목밑에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닷새 밤 동안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내용도 닷새로 나눠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나중에 아이가 자라면 나도 닷새동안 한부분씩 밤에 잠자리에서 읽어주려고 한다.
아이들은 다음날을 기다리며 설레여 할 것 같다.
내용을 들어가보면 첫부분부터 예사롭지가 않다.
무쇠인간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모른다. 그런데 아주 절망한 것 같다. ’벼랑끝에 내몰린다’라는 말이 있듯이 무쇠인간은
벼랑에서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 터어어어어엉!
이 바위 저 바위 수없이 부딪히고 또 부딪혀서 다리가, 팔이, 손이, 머리가 떨어져 나간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하지만 이것은 무쇠인간의 최후가 아니다. 어떤 연유에선지 무쇠인간은 다시 손과 다리, 눈알, 등을 다시 찾아 맞추고
바다속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첫날 밤의 이야기는 끝이 난다.
둘째 날 밤 이야기에선 무쇠인간이 돌아온다. 이유는 생략되어졌다. 하지만 무쇠인간은 돌아와 농부들의 강철과 무쇠로 된
농기구를 몽땅 먹어버린다. 마을 사람들은 경찰을 부를까 군대를 부를까 하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거라며 자신들의
힘으로 커다란 구덩이를 파서 무쇠인간을 유인해 구덩이 속에 묻어버릴 계획을 짠다. 그리고 결과는 계획대로 이뤄진다.
셋째날 밤, 무쇠인간은 어떻게 되었을까? 계절이 변한다. 봄이 오고 여름이 지나고 사람들은 무쇠인간을 잊어버린다.
하지만 무쇠인간은 땅속을 뚫고 나타난다. 동네 사람들은 불안에 떨지만 처음 무쇠인간을 발견했던 아이 호가스는
아이디어를 낸다. 무쇠인간이 고철을 좋아하니 고철더미 모아놓은 폐기장에서 무쇠인간이 마음껏 먹게 해주는 것이다.
너무도 재밌다. 사람들이 만들어 사용하다 버린 쓰레기를 무쇠인간이 먹어준다.
넷째날 밤, 드디어 악의 화신 우박천룡이 등장한다. 그 크기가 어마어마 하다. 이제까지 봐았던 그 어떤 악의 존재보다
몸집이 크다. 오스트레일리아 땅을 온통 뒤덮다시피 하며 꼬리는 태즈메이니아 섬을 넘어서 바다까지 길게 뻗어졌고,
앞발톱은 카펜테리아 만에 걸쳐졌다니…. 지도를 펴놓고 봐야 할 것 같다.
어쨌든 예전엔 적이었지만 지금은 친구가 된 무쇠인간은 이 우박천룡에 맞서 싸우기로 한다.
다섯째날 밤, 무쇠인간과 우박천룡의 대결이다. 그렇다고 치고 받고 싸우는게 아니다.
상상력이 재미있는데 뜨거운 것을 견디는 내기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그동안 무거웠던 기분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깔깔거리며 웃었다. 내기라니… 어쨌든 내기는 무쇠인간의 승리다. 우박천룡도 과거엔 우주에서 평화롭게 살았는데
지구에서 나는 전쟁소리를 들으니까 흥분이 되면서 싸움에 끼어들고 싶은 나쁜 마음이 생겨났던 것이다.
그후 우박천룡은 밤하늘을 헤엄쳐 다니며 노래를 부르고 세상은 놀랍도록 평화로워진다. 무쇠인간은 세계의 영웅이 되어
고철마당에서 여러 고철들을 먹으면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다.
인간은 아니지만 인간에 의해 인간과 유사하게 만들어진 존재를 그린 영화는 지금까지 무수히 만들어져 왔다.
왜 사람들은 영화에서든 현실에서든 굳이 인간과 비슷한 로봇을 만들고 싶어 할까? 그것은 아마도 사람들이 외롭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책임에 대한 공포때문일거란 생각도 든다. 부정적 요소는 최소화하고 인간대신 위험한 일은 떠맡아서 해결해주기 때문이란 생각도 든다. 어릴때부터 보았던 대부분의 로봇관련 만화, 영화와 책들에선 인간이 직접 적과 마주해 싸우지 않고 로봇이
대부분 싸웠다. 인간이 저지르는 무책임한 행위를 로봇이라는 은유를 통해 경고하는지도 모른다. 로봇을 다룬 이런 매체에서 인간은 로봇보다 더 감정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로봇이 인간보다 더 감성적이 되는 아이러니가 벌어진다.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은 지고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권리, 사랑하고 사랑받는 관계를 충분히 누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