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를 맺는 것도 학습입니다. 아이들은 가족들의 울타리 안에서 엄마, 아빠, 형제자매들과 관계를 형성합니다. 이렇게 가장 가깝고 익숙한 타인과의 안전한 관계를 맺어 가면서 아이들은 자기 자신만의 세계에 머물러 있을 때는 미처 몰랐던 정서적 포만감을 느낍니다. 사랑을 받고, 되돌려 주는 것을 배우면서 말이죠. 가끔 투정도 부리고 야단도 맞지만 아이들은 그런 크고 작은 충돌을 겪으면서 자라갑니다. 그런 작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아이들은 자기처럼 다른 사람들도 자신 만의 감정과 욕구가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아이들이 가정의 틀 안에서 가까운 가족들 친지들과 맺었던 관계가 안정적이면서도 수직적이었다면, 유치원이나 놀이터에서 또래 아이들을 만나 어울리게 되면서 맺는 관계는 수평적입니다. 가정의 틀 안에서 익히 알아 왔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유형의 관계를 학습하게 되는 것이죠. 새로운 관계 맺기는 아이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도전일지도 모릅니다. 어떤 어른들은 친구나 애인을 만날 때 자신과는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사람을 더 좋아한다고 하지만, 아이들은 그런 경우가 드뭅니다. 새로운 과제에 맞닥뜨렸을 때 조금이라도 익숙하고 쉬운 해법을 찾아보려 하는 것이 인간의 심리니까요. 아이들은 조금이라도 자신과 닮은 친구, 자신의 가족이나 친척들과 닮은 친구를 좋아하게 됩니다.
『체스터는 뭐든지 자기 멋대로야』의 주인공 체스터처럼 생활이 규칙적이고 조심성 많고 꼼꼼한 성향을 가진 아이라면 더욱 그렇죠. 선천적으로 익숙한 환경에서 안전성을 누리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계속 새로운 것을 찾아 탐험하는 것을 좋아 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손발이 척척 맞는 단짝 친구 체스터와 윌슨은 어떻게 서로를 받아들이고 친구가 되었을까요? 아마도 두 친구는 이미 기본적인 취향과 분위기가 많이 닮아 있었을 겁니다. 이미 닮아 있는 사람들이 함께 시간을 보내며 더욱더 비슷해져 가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죠. 누가 누군지 헷갈릴 정도로 말이에요.
체스터와 윌슨이 맺은 관계가 안정적이고 평온한 작은 도전이었다면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릴리는 커다란 도전이었을 겁니다. 조심성 많고 경계심 강한 두 아이 체스터와 윌슨은 남다른 개성이 흘러넘치는 릴리에게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쟤는 정말 특이해.”라고 릴리라는 아이를 한마디로 일축해 버린 두 친구는 릴리를 슬슬 피해 다닙니다. 새로운 유형의 관계 맺기라는 도전을 슬그머니 회피한 것이죠. 회피는 가장 쉬운 방법이니까요.
릴리를 살살 따돌리던 체스터와 윌슨은 우연한 사건을 통해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릴리에게도 좋은 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항상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릴리의 변장과 물총도 쓸모 있다는 것을 체스터가 항상 가지고 다녔던 손수건과 반창고처럼 위급한 순간에 쓸모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죠. 자신과 다른 이질적인 세계를 인정하고 포용하기 시작하면서 아이들은 새로운 관계 맺기라는 도전에 성공합니다. 완전히 달라 보이던 릴리도 알고 보니 많은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요.
그렇게 두 친구와 외따로 놀던 한 아이는 사이좋은 세 친구가 됩니다. 새 친구는 기존의 경험을 공유하고 새로운 경험을 함께 합니다. 이렇게 교류하면서 체스터와 윌슨은 릴리를 바꾸어 가고, 릴리는 체스터와 윌슨을 바꾸어 갑니다. 세 친구는 서로 닮아가지요. 세 친구가 서로 손을 마주 잡고 춤을 추고 있고, 그런 아이들의 주위를 아이들이 함께 나누었던 경험을 상징하는 물건들이 채운 후반부의 장면은 시각적, 정서적으로 풋풋하고 아기자기한 느낌을 줍니다. 한 권의 그림책은 그렇게 완벽한 피날레를 장식하고 마무리 되는 것 같습니다.
어느 날 빅터가 그 동네로 이사 오기 전까지 말입니다. 작가는 마지막 장에서 깜찍한 반전을 제시하고 끝맺음으로써 독자들에게 상상의 여지를 남깁니다. 아이들은 빅터를 피해 숨어있는 세 친구 릴리, 체스터, 윌슨이 앞으로 빅터와 어떻게 지낼 것인지 상상해 보게 되겠지요. 제 생각에는 세 친구가 빅터와도 좋은 친구가 될 것 같습니다. 이미 한 번 어려운 단계를 넘어본 아이들이니까요. 앞으로 살면서 무수히 만나게 될 또 다른 릴리, 빅터에게도 마음 한 구석에 들어올 틈을 만들어 두지 않았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