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소개글을 보고 내 머리 속에 떠오른 두 권의 그림책이 있다. 둘 다 마술같은 힘을 지닌 연필이 소재이다.
돈 피고트의 그림책 ‘마술연필’은 언제나 그레고리에게 그림을 그리자고 조른다. 그래서 마술연필과 그레고리는
여러가지 선, 모양, 집, 풍경, 동물, 사람을 그리면서 그림 속 환상의 나라로 여행을 다녀온다.
앤서니 브라운의 ‘마술연필’은 마술 연필을 가진 꼬마곰이 숲속을 거닐며 여러 등장인물을 만나게 되고,
각 상황마다 재치 넘치는 방법으로 위기의 순간을 모면한다.
그런데 올해 비룡소의 황금도깨비상으로 뽑힌 수상작 ‘빨강 연필’의 소개글을 보자마자 위에서 말한 두 책과 같은
마술 연필을 소재로 했다는 걸을 알고는 어떤 내용이 나올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그림책과 달리 읽기책에선
마술 연필을 가지고 어떤 이야기를 풀어낼까?
빨강 연필은 무엇이든 술술 써내는 마술 연필이다. 주어진 주제가 무엇이든 최고의 글을 써낸다.
글쓰기를 어려워하는 하는 아이나, 글쓰기를 잘 하고 싶은 아이라면 한 번쯤 가져보고픈 꿈의 연필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주인공 민호는 빨강 연필을 이용해 쓴 글들이 줄줄이 상을 타면서 우쭐해지는 한편 걱정이 생겨난다.
‘우리 집’을 주제로 써낸 글이 민호의 현실이 아니라 바람을 그럴 듯하게 써낸 뒤부터 친구들에게 진실을 추궁받게 되고
민호는 빨강 연필의 유혹을 이겨내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빨강 연필 없이 전국대회에 나가게 된다.
결국 전국대회에서 수상권에 들지 않았지만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써낸 민호의 글을 주의깊게 본 한 심사위원 덕분에
실제로는 더 훌륭한 상을 받게 된다. 경쟁자였던 재규가 그토록 원했던 ‘날아라 학교’의 학생이 된 것이다.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고 진실한 마음을 글로 표현한 민호의 태도가 옳았음을 보여주는 멋진 결말이었다.
이 책은 뛰어난 능력을 가졌지만 계속해서 자신의 양심과 줄다리기하게 만드는 마술연필을
우연히 갖게 된 민호의 고민을 통해 한 소년이 성장해 가는 이야기를 세밀하고 탄탄하게 그리고 있다.
수아의 유리천사를 실수로 깨트린 뒤에 그 실수를 덮기 위해 양심을 속여야 했던 민호가
빨강 연필을 없애버린 뒤 용기를 내어 수아에게 유리천사를 돌려주며 양심고백을 한 것도
민호의 내적 성장이 잘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효주에게 간 빨강 연필의 다음 이야기가 기대된다.
신수현 작가의 첫 작품이라는데 이야기의 구성이 치밀해서 읽는 내내 다음 내용을 궁금해하며 순식간에 읽어내렸다.
열 살 짜리 딸도 정말 재밌어서 책을 잡은 뒤로 후딱 읽어버렸다고 한다. 딸에게 “너도 빨강 연필이 있으면 좋겠니?” 하고 물어보니
절대 아니란다. 거짓말도 진짜처럼 술술 지어내는 연필은 싫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글은 자기가 생각해서 써야 하는데,
빨강 연필을 가지고 있으면 내 생각은 들어갈 틈도 없이 연필이 쓰는대로 끌려서 쓰게 되는 거라 옳지 않다고 생각한단다.
못 써도 열심히 연습해서 내 실력으로 쓰는 게 진짜라나?
민호나 효주처럼 어느날 자기에게 빨강 연필이 뚝 떨어지면 얼른 땅에다 묻어버리겠다고 하는 딸을 보며
애답지 않은 답변에 다소 놀라긴 했지만 잘못된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건강한 마음을 가졌다며 칭찬을 해주었다.
마술연필을 소재로 한 그림책이 무한한 상상력과 재치를 키우게 해주었다면,
마술연필을 소재로 한 ‘빨강 연필’은 유혹을 이겨내는 건강한 정신을 키우게 해주지 않았나 싶다.
나는 그리고 내 딸은 앞으로의 인생에서 얼마나 많은 빨강 연필의 유혹을 받게 될까? 그때마다 딸이 자신있게 말했듯이,
좀 힘들고 돌아가더라도 진실의 힘을 믿으며 그 달콤한 유혹을 뿌리칠 수 있기를 바래본다.
인생에서 진정한 마술은 바로 진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