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나는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되고싶었다. 걷잡을 수 없이 지나가는 시간에 끌려가지않고 내 삶이 시간을 달릴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중학생 때 어느새 나도 교복을 입은 학생이 되어있더니 고등학생이 되니 수능이란 부담감과 함께 시간의 유한성이 내게 다가왔다. ‘시간이 느리다’라고 했던 일기를 보면 가벼운 웃음을 지을 뿐이고 날 기다려주지않은 그에게 야속하기만하다. 무려4일간의 장마가 지나가고 나서야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어린 꼬마숙녀 페넬로피. 그녀는 몸이 약해 누워있는 일이 많지만 이따금 공상을 펼치곤 한다. 그녀의 내면은 감성적이고 부드러워 문체도 페넬로피의 관점이였기때문에 물흐르듯 부드럽다. 페넬로피를 보면 내가 정말 페넬로피의 눈으로 그 장면을 보고있는 것 같다. 이 책의 대부분의 문장은 길다.
p.57 나는 할머니가 나간 뒤에도 오랫동안 눈을 뜬 채 이끼가 낀 달콤한 물과 라벤더와 회반죽 냄새가 뒤섞인 황홀한 향기를 들이마시며 침대에 누워 있었다.
여느 판타지소설은 3인칭으로 쓰여져서 풍경 또는 상황을 그려지듯 묘사하는 방식이다. 때문에 막연히 판타지소설의 문체가 거북하다고 생각했었지만, 그것이 ‘묘사’ 때문인지 ‘3인칭’의 방식의 차이인지는 가려내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 책은 페넬로피의 눈으로 본 세계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묘사에 있어서 판타지소설 특유의 현학적인 느낌이 없었다. 어린 소녀의 시점으로 보기 때문에 ‘묘사’가 ‘묘사’ 자체로 방치되는 것이 아닌 ‘전개’에 많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어쩐지 이런 늘여쓴 문장까지 사랑스럽게 다가왔다. 그저 ‘나는 할머니가 나간 뒤에도 잠들지 않고 물을 마시며 침대에 누워있었다.’인 문장이지만 긴 관형어를 붙여 페넬로피의 색깔이 드러났다.
페넬로피는 몸이 약해 친척집인 새커스농장에 맡겨지고 그녀의 공상은 날이 갈수록 현실처럼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층 층계참의 한 방을 열자 까만옷을 입은 하녀들과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사람들을 보게된다. 페넬로피는 당황스러워 어쩔줄을 모르다 보이는 사람들이 말을 걸어오기 시작한다. 도대체 어디서 왔냐고, 당신은 누구냐고.
p.62 나는 망설이다 문하나를 열어 보았다. 그리고 그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두어 걸음 밖에 떨어지지 않은 방 안에서 네 여자가 상아로 만든 주사위 놀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탁자에 둘러앉아 있었고, 열린 난로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중략) 그때 작은 스패니얼 개 한마리가 방을 가로질러 나에게 달려왔다. 여자들은 고개를 돌려 깜짝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들도 나만큼 놀라서 벌떡 일어났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페넬로피의 현실도 공상도 아닌 이상한 모험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티시할머니가있는 새커스 농장에 자신이 모르는 사이 다른사람들이 가득차 있었고 그들은 페넬로피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리곤 다시 현실로 돌아와 눈을 떠보면 티시할머니가 옆에 있곤했다. 글감이 훌륭했다. 시간이란 따라잡을 수 없는 존재라 늘 계획을 세우고 공부를 했다. 500년전 과거와 현실을 반복하는 페넬로피의 삶. 그녀의 삶이 내가 꿈꿔오던 삶일까?
p.242 ‘지금은 현재야.’ 나는 생각에 잠겼다. ‘과거와 미래는 모두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것의 한쪽만 볼 수 있고 다른쪽은 안개 속에 숨어있어.
페넬로피의 과거는 현재가되었다. 과거일들이 눈앞에서 일어나고 과거의 일이 페넬로피에겐 미래가 되었다. 여기서 엄청난 충격을 준다. 지금 이순간이 지나가면 과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시간은 미래로 따진다. 그리고 이순간이 가버리면 절대 되돌릴 수 없는 게 시간이다. 페넬로피는 20세기에서 16세기로 역사를 돌린것이다. 과거의 인물 메리여왕을 구출하려는 앤터니 배빙턴과 페넬로피가 사랑한 프랜시스 배빙턴. 그저 역사책에 기록되있는 사건이 페넬로피에겐 현실이 되었다. 옮긴이는 말했다. 과거로 들어갔다 현재로 돌아오는게 시간을 초월한 영원성이라고. 누구에게나 주어진 시간을 이렇게 뒤집을 수 있는 앨리슨 어틀리의 상상력과 뛰어난 묘사가 마음에 들었다. 1939년에 발표된 소설이 지금까지 사랑받는 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힘이라고 생각한다.
페넬로피는 내가 바라던 시간을 달리는 소녀이다. 기다려주지 않은 시간을 달려가며 시간을 즐기며 살고싶었다. 페넬로피의 삶은 멋졌다. 자신이 가볼 수 없는 과거로 돌아가 사랑에 빠지고, 할머니를 만나고 신분제를 겪어보는 것. 정말 신선하고 흥미롭게 보였다. 하지만 페넬로피는 내게 말한다. 지금있는 곳이 바로 현재이고, 나는 지금 현재만을 보고 살아가야한다고. 오늘 해야할 일을 플래너에 적으며 페넬로피를 생각한다. 그녀는 분명 그녀의 현재안에서 잘 살고 있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