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 간격과 여백이 여유롭고 활자크기가 시원스럽고 삽화까지 군데군데 자리 잡은 책이라도 150여 쪽의 책 세 권을 일곱 살짜리 아이가 읽으려면 웬만큼 재미가 없어서는 끝까지 읽어내기 힘들다. 물론 엄마가 책 읽어주는 것을 들어주는 것도 재미가 없다면 읽어주는 사람의 노고도 없이 한숨을 푹푹 들이쉬고 내쉬고 한다. 보물 같은 이 책을 우연히 발견하고 ‘도둑’이라는 제목과 차례에서 언급된 경찰, 마법사, 요정, 마술반지 등으로 미루어 우리 아이의 취향에 맞는 책일 거라는 판단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보다 먼저 보려고 읽고 있는데 놀이하며 오가며 쓱쓱 훔쳐보더니 찰싹 붙어서 빨리 읽어 달라고 재촉한다. 첫 장을 넘기는데 삽화가 굉장히 낯익다. 서둘러 확인해보니 미하엘 엔데의 ‘기관차 대여행’ 시리즈의 그림을 그린 바로 ‘프란츠 요제프 트립’이다. 이 그림 작가와는 지난봄을 함께 한 인연이 있다. ‘기관차 대여행’의 번역본인 「짐 크노프와 기관차 루카스」와 「짐 크노프와 13인의 해적」을 밤마다 읽어주느라 쏟아지는 잠과 싸우고 하루에 읽어줄 분량을 정하느라 아이와 싸워야했었다. 800쪽 분량을 하룻밤에 다 읽어달라고 할 기세였으니 다 읽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었다. 미하엘 엔데의 환상적인 이야기와 찰떡같이 어우러졌던 요제프 트립의 그림이 환상적인 이야기에 사실감을 부여하는 듯한 역할을 톡톡히 해냈었다. 마찬가지로 ‘왕도둑 호첸플로츠’시리즈 『왕도둑 호첸플로츠』, 『호첸플로츠, 다시 나타나다!』, 『호첸플로츠 또 다시 나타나다!!』의 이야기에 실감나는 매력을 더한다.
『왕도둑 호첸플로츠』의 등장인물들을 간략히 소개하자면…우선 언월도 한 자루와 단도 일곱 자루를 차고 다니는 왕도둑 호첸플로츠가 있다. 그리고 왕도둑 호첸플로츠를 잡겠다고 나선 용감한 소년 카스페를과 제펠이 있고, 손잡이를 돌리면 노래가 나오는 커피콩 가는 기계를 도둑맞은 카스페를의 할머니가 있고, 이 마을의 유일한 경찰임에 틀림없는 딤펠모저 경위가 세 편의 시리즈 중심에 있는 인물들이다. 각각의 이야기들마다 추가되는 인물들이 더 등장하는데 1편에 해당하는 『왕도둑 호첸플로츠』에는 사악한 마법사 페트로질리우스 츠바켈만(헷갈리기 딱 좋은 이 이름을 지금 물으니 아이 입에서 1초도 지체하지 않고 튀어나온다. 이야기 속에 이름을 이용한 웃음 코드가 있어서 그런지 잊어버리지도 않는다.^^), 사악한 마법에 걸린 요정 아마릴리스가 등장한다.
어린이 책이 독자인 어린이들에게 사랑을 받으려면 몇 가지 갖춰야 할 장치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이야기 속의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인물들이 아닐까 한다. 잘나고 똑똑하고 완벽한 모습의 치밀한 완벽함이 아니라 어리숙하고 실수도 연발하고 반짝이는 기지를 발휘하기도 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투영해놓은 인물을 아이들은 자신과 동일시한다. 『왕도둑 호첸플로츠』에 등장하는 빨간모자 카스페를과 초록모자 제펠이 그들이다. 할머니의 커피콩 가는 기계를 훔쳐간 도둑 호첸플로츠를 잡겠다고 나섰다가 도둑에게 잡히지만 꾀를 내서 마법사와 도둑에게서 도망치는 것도 모자라 마법사를 물리치고 요정 또한 마법에서 풀려나게 도와주고 도둑까지 잡아서 집으로 돌아오는 멋진 아이들이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캐릭터 중 악당과 경찰과 마법사와 요정에 대해서도 각각의 캐릭터들의 고정된 이미지도 물론 즐기지만 본 모습에서 허점이 보이거나 반전을 보여줄 수 있어야 정말 살아있는 캐릭터가 된다. 악당인 왕도둑 호첸플로츠는 악명 높은 이미지와 달리 고작 할머니의 커피콩 가는 기계나 훔치고 무시무시한 칼을 차고 다니지만 후추 총을 주로 사용하고 집안 치우기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성격이다. 마법사 페트로질리우스 츠바켈만은 온갖 마법을 다 부릴 줄 알지만 감자 껍질 벗기는 마법은 성공시키지 못했다. 그런데 비극은 이 마법사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감자로 만든 것들이다. 그래서 하루 종일 감자 벗기는 일을 시킬 만하고 마법을 훔치지 못할 만큼의 멍청한 하인을 찾고 있다. 이 마을의 유일한 경찰인 딤펠모저 경위는 사라진 아이들이 살아 돌아온 것보다 실종공고에 사용된 관청 용지 한 장을 더 아까워하는 관료주의적인 모습 뒤에 의협심과 인간적인 면모를 감추고 있는 인물이다. 이렇게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캐릭터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재미있게 끌어가는 것은 순전히 작가의 몫이다. 곳곳에 웃음 코드들이 장착되어 있어서 아이들의 웃음이 영락없이 터져 나오는 부분이 있고, 악당들을 통쾌하게 혼내주고 의기양양할 법도 한데 할머니의 커피 기계와 자두 과자로 따스하게 마무리하는 이야기가 주는 재미와 웃음과 감동은 어린이의 눈으로 보고 어린이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어린이 책 작가가 마땅히 받아야할 영광이다.
『왕도둑 호첸플로츠』는 1962년에 발표된 작품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전세계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아온 어린이 책의 고전이라 할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미하엘 엔데의 ‘기관차 대여행’시리즈도 1960년과 1962년에 나온 작품이라 하니 1960년대는 독일 어린이들에게 축복 같은 시절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왕도둑 호첸플로츠’시리즈와 ‘기관차 대여행’시리즈는 우리 아이의 책읽기의 전환점이 되어준 책이고 열성적으로 읽어낸 책이다. 프로이슬러와 미하엘 엔데의 환상적인 이야기에 이어서 소개해주고 싶은 작가가 있는데 바로 ‘발터 뫼르스’다. ‘캡틴 블루베어’와 ‘루모’의 모험의 단편적인 이야기들을 베드타임 스토리로 이미 알고 있는 아이가 좀 더 자라서 ‘발터 뫼르스’의 작품들을 만난다면 틀림없이 마음에 쏙 들어 할 거라는 생각만으로도 흐뭇해지고 설렌다. 프로이슬러, 미하엘 엔데, 발터 뫼르스. 우연히도 죄다 독일 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