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딱이? 서 있는 것조차 불안해 보이는 낡은 집과 그 앞의 사람들. 누가 삐딱이일까?
흡사 3D 화면을 들여다 보듯 독특한 표지를 보며 삐딱이에 대한 궁금증이 먼저 생겼다. 집이 주인공이다. 불이 환하게 켜진 창문은 두 눈, 문은 코와 입을 대신하는 듯 보였다. 과히 기분이 좋아보이는 표정은 아니다. 무슨 일일까? 집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표정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버지니아 리 버튼의 ‘작은 집 이야기’가 떠올랐다. ‘작은 집 이야기’가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사계절의 변화와 도시화의 과정, 무수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면 ‘삐딱이의 이야기’는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해진다.
속표지의 삐딱이. 편안해 보이는 얼굴은 아니다. 담벼락에 기대 말뚝박기를 하고 있는 아이들과 지붕 위에서 호기롭게 칼을 쳐든 아이들 모습은 흥겨워 보이지만 붉은 지붕은 열받은 삐딱이의 기분을 대변해 주고 있다. 삐딱이가 처음부터 삐딱이였던 것은 아니다. 무려 7명이나 되는 아이들과 생활해야 하는 공간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던 것이다. 참다 못한 삐딱이가 선택한 방법은 가출이다. 다른 가족을 찾아나선 것이다. 하지만 문제 상황을 회피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가족을 떠난 삐딱이는 거센 강물을 건너 도시로 향한다. 뭔가 새로운 돌파구가 되어 줄 것 같은 도시는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누구도 반겨주지도 않고 눈길도 주지 않는다. 거기다 산적까지 만난 삐딱이는 다행히 위험을 벗어난다. 하지만 다시 삐딱이 앞에 나타난 것은 산적보다 더 무서운 존재였다. 주인에게 버림을 받은 커다랗고 멋진 집이 삐딱이가 버린 가족에게 나서겠다고 한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마을. 여기저기 삐딱이를 찾는 전단이 붙어있다. 하지만 이미 가족들에겐 크고 멋진 집이 생긴 후. 가족들도 삐딱이가 반갑긴 하지만 커다란 집도 나몰라라 할 순 없다. 그때 생각해 낸 것이 바로 2층 집. 9명이나 되는 가족들에게 행복한 이층집이 생겼다. 이제 삐딱이도 행복하다.
삐딱이는 누구일까? 책을 읽는 내내 생각했다. 단순히 집이 집을 나갔다는 설정만은 아닐꺼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드높은 교육열에 아빠의 무관심이 자녀를 대학에 보낸다는 우수갯소리에 멍들은 이 시대의 아빠들일까? 인서울 대학이 인생 최고의 목표인양 닦달하는 부모들의 채찍에 마음이 삐둘어져버린 이 시대의 아이들일까? 아이들과 남편의 뒷바라지에 나는 없어진 이 시대의 엄마들일까? 그 모두일수 있겠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그들에게 해답은 가장 가까이 있는 파랑새를 찾으란 것이 해답일까 싶었다. 그 파랑새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일단은 그림 속에서 단서를 찾아 보았다. 그림 초반부터 엄마 아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7명의 아이들이 놀이는 호쾌하기만 하다. 울상인 삐딱이의 모습과 대조적으로 말이다. 집이라는 것, 가족이라는 것은 그저 낱개의 집합만은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고 이해하고 아껴주는 것, 그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서로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그 속에 비친 모습을 살피고 다독이는 따스함이 있다면 삐딱이의 일탈을 없었을 것이다.
오늘 우리 집의 삐딱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다시 살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