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색 표지를 보며 문득 오른쪽 구석의 작은 화분이 눈에 들어온다. ‘과학의 씨앗’이라는 문구도. 과학적 사고를 먼 곳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문과 종이 한 장, 피부 등에서 그 씨앗을 찾아 과학적 사고의 씨앗을 함께 심어주는 기획이겠구나싶다. ‘열려라, 문’을 보며 다양한 문과 활용성에 대해 아이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되었던 기억이 새삼난다.
아이들과 함께 작업을 하다보면 정말 우스운 일이 벌어진다. 바로 색깔에 성별을 부여하는 일이다. 분홍은 여자, 파랑은 남자. 혹여라도 바뀌기라도 할라치면 마치 자신의 성이 뒤바뀐 양 난처해한다. 어른들에겐 그게 뭐가 중요할까 싶지만 아이들에겐 정말 중요한 일이다.
색깔은 그저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빛깔 무지개와 크레파스, 색연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햇빛에 의한 과학적 존재만이 아니라 나름대로 감정을 가지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도 한다. 그래서 벽지를 선택할 때에서 남자방, 여자방의 기준 이외에도 수험생이 있는지, 성격은 어떤지를 배려하기도 한다.
색깔은 사람의 오감 중에서 시각과 가장 끈끈한 연을 맺고 있다. 시각이 없다면 색깔이라는 존재 자체가 무의미 할 정도다. 그 시각을 통해 본 색깔을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노릇노릇 구워진 식빵과 까맣게 타버린 식빵. 누구라도 노릇하게 구워진 식빵을 보며 입안에 침이 고일 것이다. 맛을 보지 않아도 이미 색을 통해 기미를 했다고나 할까?
뿐만아니라 양말의 착용 여부와 시간 경과도 알 수 있다. 색이 누렇게 바랜 부모님의 결혼 사진 속에서 또다른 나를 발견하는 경이로움을 색이 전해준다. 소풍가기 전날의 간절한 기도를 하늘빛이 대신 말해주기도 하고 나뭇잎의 색깔만으로 병이 걸렸는지 한눈에 진단할 수 있다. 그 외에도 과일의 완숙도, 물의 오염 여부, 계절과 밤낮의 여부도 알 수 있다. 나들이 후 바뀐 가족의 얼굴빛은 나들이 중의 날씨를 한 눈에 짐작하고도 남는다. 색깔은 사람의 감정도 말해준다. 시뻘겋게 상기된 얼굴색은 화가 났음을, 양 볼에 발그레한 붉은 기는 부끄러움을, 대론 음주 여부도 말해준다.
책을 읽으며 내내 ‘맞아, 맞아’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늘 너무나 당연하게 주변에서 볼 수 있었던 색깔들이었기에 잊고 있었던 것들을 그림으로 잘 표현해 주었기 때문이다. 가족들이 옆에 있어 소중함을 깜박 잊듯이 말이다. 그러면서 새삼 주위를 둘러보게 된다. 베란다 창 밖으로 보이는 나무들이 오늘은 어제와 다르게 어떤 색깔의 변화가 있는지, 잠자리에서 일어난 아이들이 얼굴에 어떤 색깔이 띄워져 있는지 말이다. 눈 먼 소경이 세상에 첫 눈을 뜨듯 새롭고 신기한 새날을 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