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 처음으로 혼자 하는 도쿄여행에서 꼭 들러보고 싶었던 어린이 책
전문 서점 ‘크레용 하우스’에서 이수지 작가님의 책 ‘wave’를 처음 만났습니다.
보고 싶은 것도, 담아오고 싶은 것도 많았던 탓에 무더운 날씨에도 도쿄의 여기저기를
누비다가 조금은 지친 상태에서 들린 크레용 하우스에서는 여름 시즌 책들만을 모아 놓은
코너가 있었습니다. 그 많은 책들 중에서도 유독 시원하게 눈에 확 들어오는 책이 ‘wave’였습니다.
작가가 한국분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더 반갑고 책 안의 내용이 너무 궁금하여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책을 구입하였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저는 일본에서 만난 ‘wave’와의 인연을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교보문고의
어린이 책 코너에서 그림이 너무 마음에 들어 책 한권을 구입하게 되었는데 그 책이 바로 이수지
작가님의 ‘동물원’이었습니다. 신기한 우연의 인연인 것 같아 저에겐 특별한 기억으로 아직까지
남아 있습니다.
그 후로 이수지 작가님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책작가가 되었습니다.
이수지 작가님을 떠올리면 이런 만남의 기억부터 생각나서 이번 책의 리뷰와는 상관없이
저도 모르게 얘기가 길어 졌네요. ^^
‘거울속으로’와 ‘파도야 놀자’, ‘그림자놀이’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 그림책 삼부작이라고
하는데요, 사실 저는 이 세 권이 연작이라는 사실을 이번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각 권으로도 훌륭한 이 세 권의 책이 가진 공통된 연결 고리들을 알아가게 되면서 놀랍기도
하고 끊임없이 책에 대해 생각하셨을 작가님이 너무 대단하게 느껴졌습니다.
책을 펼치게 되면 가운데 제본선을 경계로 좌우로 두 공간이 생기지만, 사람들은 그 접혀지는
제본선은 없는 셈 치고 책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수지 작가님은 그 경계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경계를 이용하고 이야기의 일부가 되게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출발하셨다고 합니다.
‘거울속으로’ 노트
왼쪽과 오른쪽 어느 쪽이 실재의 아이인지 어느 쪽이 거울 속의 아이인지 알 수 없게 섞여
들기도 합니다.
아이 이미지는 한쪽의 이미지를 컴퓨터에서 복사한 후 반전해서 사용하였으나 중앙의 데칼코마니
무늬는 실제로 물감을 떨어뜨려 찍은 것을 그대로 쓰셨다고 합니다.
명확하고 강렬한 선획의 느낌과 손가락에 비벼 퍼지는 동적인 양감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목탄 재료의
사용도 좋았던 것 같습니다.
‘파도야 놀자’ 노트
사실 저는 파도의 그림을 너무 좋아하는데 이렇게 다양하고 재밌는 장치들이 있는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이 책을 통해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아이가 놀고 있다는 그 설정과 경계를 통과 하는
장면의 표현에서 아이가 들어가고 있는 모습만 보이고, 오른쪽 페이지에는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혹은 오른쪽 페이지로 나와버린 몸의 나머지 부분들이 왼쪽 페이지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너무 생각없이 책을 본건 아닌지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주인공이 여자아이인 이유에 대해서도 알게되었는데요 아이의 기운 가득한 움직임을 팔락이는
치마를 통해 보여주기 위해 여자아이가 주인공이 되었다고 합니다.
감각적이고 시원한 터치들, 스케치를 위하여 간 바닷가에서 만난 갈매기가 책에도 등장하게 된 사연,
감초역할을 하는 갈매기가 아이의 마음을 대변해주듯 같이하는 행동들… 몰랐던 장치들의 재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림자 놀이’ 노트
그림자가 현실의 그림자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환상이 되는 변화(빗자루의 그림자가
꽃이 되고 자전거 바퀴의 그림자가 두 개의 달이 되는)와 그림자들이 합쳐져 하나의 큰 괴물을
만들어내는 모양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림자-실루엣-공판화의 연상고리에서 만난 스프레이를 재료로 사용하셨는데요
칼로 공판의 그림자 윤곽선을 하나하나 모두 따 내셨다는 작업과정에서 손가락의 고통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림자의 경계를 살포시 흐려주는 듯한 스프레이 작업의 느낌은 참 아련해 지는 듯합니다.
책의 중간 중간에는 미국이나 브라질 등 외국에 있는 아이들이 이수지 작가님의 그림책을 보고
느낀점을 다시 그림으로 표현한 그림들도 함께 실려 있는데요 아이들의 생각이 재미있었고요
글이 없는 그림책을 보고 아이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들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이었기에
감탄하기도 했습니다.
‘페이지 넘기기’책에서는 투우사가 사용하는 붉은 물레타를 한 장에 걸쳐 표현했는데 그 장을 넘김으로써
이야기의 진행에 동참하고, 마치 그 현장에 있는 듯한 느낌도 갖게 했습니다. 표지에는 실제 손가락이미지가
사용되어 손을 이용해 책장을 넘기는 부분이 부각되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성공한 그림책은 독자의 상상력으로 채울 수 있는 빈틈을 적절히 남겨 둡니다. 실패한 그림책은 작가의
부족한 상상력의 빈틈을 그저 이미지들로 꽉 채워 두겠지요.
좋은 그림책은 이야기와 그 이야기의 표현 방식이 서로 딱 달라붙어 있습니다. 마치 이 표현 방식이 아니면
이 이야기가 아예 성립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조차 주지요. 표현방식=글과 그림의 조합 방식, 그림의
스타일과 전략, 책의 모양과 페이지를 넘기는 방향 등,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독자에게 나르는 모든 방법
글 없는 그림책을 읽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추론 능력과 그림의 코드와 기호를 독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어떤 단서를 찾아내어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은 독자의 몫입니다. 느긋이 모호한 의미를
즐기고, 질문을 던지고, 자신의 답변을 마련하는 것이 글 없는 그림책을 즐기는 방법이겠지요. 여기저기의
이미지들을 널뛰기판 삼아 도약하는 상상력을 즐기면 좋겠지요.
다소 혼돈스러운 과정을 불편해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때가 가장 창조적인 순간입니다. 페이
노들먼은 <어린이 문학의 즐거움>에서 책 읽기를 ‘받아들여야 할 대답이 아니라 계속 생각해야 할
질문의 원천’이라고 했죠.
내가 하는 생각의 줄기를 끝없이 더듬고 확장시켜 보는 것. 그것이 창조적인 책 읽기를 위해
필요한 태도이겠지요. “
“아이들에게 항상 배웁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도 모르게 내 것이 되는 것이지, 내 안에 아이들을 끼워
맞춤으로써 얻어지는 것은 아니겠지요, 오히려,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도움은 이런 식으로 옵니다.
작업이 진행되다가 도저히 해결 안되는 지점이 늘 있지요. 물러서지도 나아가지도 못하고 멈춰 있는
그런 순간에, 보이지 않는 아이가 나타나 제 어깨를 툭, 칩니다. 그렇게, 가장 상상력이 필요한 순간에도
합리성의 잣대만을 대고 있는 자신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놀이를 하는 기분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지요.”
브라질에서 만난 한 아이의 이야기…
“왜냐면 어린이는 매일매일 똑같고 싶지 않으니까!”
“이 모든 생각과 노력이 향하는 목적은 결국, 나에게 절실한 것으로 당신을 만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내게 아름답고 즐거운 것은 그에게 전이된다고 믿습니다. 그가
어른이건 아이이건, 진심으로 전할 요량으로, 온 마음을 다해 작업해야 만날 수 있겠지요.
이 비범한 그림책이 저에게 그 모든 것을 해 볼 수 있다고 속삭입니다.”
“영감은 아무 데서나 옵니다. 모든 것은 작가의 원천입니다. 작가가 모아 놓은 조각들은 작가가
좋아하는 구체적인 물건, 이야깃거리, 분위기, 기법, 혹은 어떤 주제 또는 개념이거나, 훌륭한
남의 작업이기도 하지요. 질투는 진정한 나의 힘입니다. 어디에서 근원이 왔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재료를 어디까지 밀고 가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변명을 둘러대면서 오늘도 끊임없이
뭐 쓸 만한 것 없나 주변을 뒤지고 있지요. ‘언젠가는 써먹어 볼’ 요량으로 그러모은 파편들은
느슨하게 부유하다가 어느 순간 기적처럼 연결되어 뭔가 될 것 같다는 느낌, 반짝 섬광처럼
빛나는 어떤 것이 됩니다. 떠오르는 생각들을 풀어 놓고 늘어놓기 시작하지요. 이때가 저에게는
창작의 과정에서 가장 즐겁고 재미있는 순간인 것 같습니다.
순진한 정열로 밀고 가다가 중간쯤 이르면, 도대체 이것이 말이 되긴 하는 걸까, 독자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과연 이것이 의미 있는 일일까, 등의 생각들이 끼어들기 시작합니다. 그럴 때는 자꾸
초심으로 돌아가 나를 가슴 뛰게 했던 최초의 발상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하려 애쓸 도리밖에 없지요.
작업을 한다는 것은 매번 불확실성과 대면하는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림책을 만드는 것은 끝없는 문제 해결의 과정 같습니다.
대개의 답은 스스로의 작업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 난관을 지나면 결국 작업에 탄력이 붙어
그야말로 몰두하게 됩니다. 뭔가 내 안에서 밀고 나와 나도 모르는 힘에 이끌려 달려가는 순간이죠.
그때그때 자신에게 절실한 것들로 하나씩 좌표를 그리다 보면, 어느 순간 멀리서 바라보았을 때,
내가 여태껏 무엇을 향하고 있었는지 알게 되겠지요.”
너무나 만나고 싶었던 책입니다.
그림책 작가를 꿈꾸고 있는 한 사람으로써 이번 책의 의미가 컸습니다.
읽는 내내 밑줄 긋고 마음에 오래 담아두고 싶은 얘기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재료와 표현방법에 대한 고민과 책 그 자체에 대한 생각과 작업과정과 문제해결 방법, 그림책의
출발점인 어린이의 존재와 독자에 대한 생각 등…
즐거운 상상을 해보자고 손짓하고 있는 듯한 이 책을 그림책작가를 꿈꾸는 사람들은 물론 그림책을
사랑하는 아이와 어른 모두에게 적극 추천합니다.
2012년 새해의 시작, <이수지의 그림책>을 읽고 작가님이 말씀하신 ‘반짝 섬광처럼 빛나는 어떤 것’을
만나기 위해 더 노력해야겠다는 기운 가득한 에너지를 얻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