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진정 사랑하는 그림책 『나의 계곡』

시리즈 비룡소의 그림동화 123 | 글, 그림 클로드 퐁티 | 옮김 윤정임
연령 7~10세 | 출판사 비룡소 | 출간일 2004년 7월 7일 | 정가 14,000원

 

누차 얘기했지만 그림과 글 두 가지 모두 탁월한 실력을 갖춘 그림책 작가는 흔치 않다. 그림책 작가로서 두 가지 재능을 두루 갖췄다는 것은 자신이 창조해낸 세계에 가장 근접한 모습을 그려낼 수 있는 요술지팡이를 갖고 있는 셈이다. 그림책 작가의 글과 그림의 원천은 바로 상상력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에 발을 딛고 선 세상 이야기이건 작가에 의해 완벽하게 창조된 환상의 세계를 이야기하건 상상력이 비를 뿌리고 해를 비춰줘야 특별한 생명력을 갖게 된다. 첫 만남부터 경탄을 금치 못했고 그림책의 특별한 재미를 알게 해줬고 그 이후에 읽는 그림책의 기준이 되었던 작가가 바로 클로드 퐁티다. 1985년에 자신의 딸 아델을 위해서 처음 만든 어린이책 <아델의 앨범>은 무척 궁금하지만 번역본으로 국내에 소개된 것이 없다. 클로드 퐁티의 작품은 『조르주의 마법 공원』, 『끝없는 나무』, 『나의 계곡』 세 권이 내가 만난 전부다. 국내 전집에 묶여있는 책이 한권 더 있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 정기적으로 작품을 검색해 봐도 더 이상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쉽지만 이 세 권을 가끔씩 꺼내 읽어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글이나 그림 어느 것 하나 아쉽거나 나무랄 것이 없는 내겐 완벽하게 환상적이고 착한 상상력의 결정판이다.


반지의 제왕의 동화 같은 ‘호빗 마을’이나 해리 포터의 비밀스런 마법 학교‘호그와트’처럼 클로드 퐁티는 『나의 계곡』에서 투임스라는 종족들이 살고 있는 매력적인 공간을 상상력으로 가득 채우고 있다. 투임스들은 인간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너구리나 다람쥐의 생김새를 닮은 듯하다. 투임스들의 수명은 짐작할 수 없다. 『나의 계곡』의 화자로 등장하는 푸치블루라는 아기 투임스가 들려주는 이야기로 짐작해보면 투임스는 백 살이 넘어 첫 출산을 하고 숲에서 길을 잃었다가 삼백 년 후에 조금 자라 다시 나타나기도 하고 1247살까지 살았다는 투임스도 등장한다. 투임스들은 집나무라는 공간에서 대가족이 함께 생활하고 심성이 착하고 인정 많고 이야기와 노래와 춤을 좋아하고 예술을 사랑하고 비밀에 대한 맹세는 어기는 법이 없고 웬만해선 화내는 법이 없는 매력적인 종족이다. 투임스들이 살고 있는 집나무의 내부구조를 살펴보면 층마다 벽면에 작은 도서관들이 갖춰져 있고, 투임스 묘지에는 책읽기 좋아하던 투임스를 위해 이야기 한 토막 적어주라는 공책이 놓여진 정원이 있다는 이야기를 통해 투임스들이 책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기 투임스들이 즐기는 재미있는 놀이 중 가장 으뜸이 책을 읽는 거라고 하면서 아기들이 나란히 앉아서 서로의 등에 책을 기대놓고 책을 읽는 장면은 정말 사랑스럽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지만 환상적이고 매력적인 이야기들이 그득한 그림책이다. 시원스레 커다란 판형은 우리집 그림책을 통틀어 최고다. 처음에는 책꽂이에 자리 마련하기 힘들 정도여서 놀랐지만 매력적인 투임스의 계곡을 들여다보기에 딱 적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클로드 퐁티의 그림책은 전부 다 이리 큰 판형이지만 작은 사이즈였다면 담아내기 곤란한 세상이다. 투임스라는 종족의 이야기와 이들이 사는 계곡이 실재하는 듯 느껴지게 만든 환상적인 그림은 시간을 두고 오래 즐기면 더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계곡의 숲과 강의 여울목과 평원과 바위와 길의 이름들을 기록한 투임스 마을의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나의 보잘것없는 상상의 날개도 꿈틀대기 시작한다. 곳곳에 숨겨진 신화적 상징과 철학적 은유도 이 책을 매력적으로 만드는데 한몫을 한다.


『나의 계곡』은 마지막 장을 천천히 덮으라고 충고하고 싶다. 이 책의 마지막 장면을 그냥 지나친다면 영화가 다 끝나고 성급히 자리를 떴다가 결정적 크레딧 쿠키를 놓치게 된 경우와 같다. 지금까지 투임스들의 생활상과 매력적으로 묘사한 계곡이 큰 계곡에서 바라보면 아주 작은 집나무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기로 끝을 맺는데 그림은 첫 장면에 등장한 투임스들의 계곡이 작게 축소되어 커다란 나무의 드러난 뿌리 사이로 멀리 보인다. ‘유주얼 서스펙트’처럼 제대로 뒤통수 때리는 정도는 아니지만 기억에 남을만한 엔딩이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 지구라는 행성이 생쥐들이 주문의뢰해서 만든 슈퍼컴퓨터였다는 결말과 영화 ‘맨 인 블랙’에서 외계 생명체가 태양계와 주변 은하계가 들어있는 구슬로 구슬치기를 하는 엔딩처럼 재치 있고 유쾌함 속에 철학적 냄새를 풍기는 인상적인 엔딩이다.(엔딩이다..로 끝나는 내 리뷰의 엔딩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