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부터 30도를 웃도는 더위 때문에 밤잠을 설쳐 피곤하던 터에 등골이 오싹해지면서도 무지 이쁜 그림책 하나를 만나게 되었다. 뜨거운 여름이면 수많은 공포 영화가 쏟아져 나온다. 오싹해지는 공포영화로 더위를 한방에 날려버리라고 광고를 해대지만 무서운 것을 잘 못 보는 나는 그림의 떡이다. 하지만 이렇게 예쁘면서도 약간의 공포감이 드는 그림책이라면 무조건 좋다.
옛날 옛날에 이야기를 아주 좋아하는 아가씨가 있었단다. 아가씨는 다른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모아 깨알같이 적어서 이야기 주머니에 고스란히 넣곤 하였단다. 하지만 정작 누가 들은 이야기 좀 해 달라고 하면 이야기 보따리를 풀지 않았단다.
반면 몸종 아이는 이야기를 듣는 즉시 솥뚜껑에게도, 항아리에게도, 두꺼비에게도 다 해 줬단다.
세월이 흘러 아가씨가 열 세 살이 되자 혼례를 치르게 되었단다.
(작가님은 이 장면에 일부러 복주머니처럼 생긴 금낭화를 그려 넣으셨다고 한다. )
마냥 기뻐야 할 혼례날, 무시무시한 일이 아가씨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바로 이야기 보따리 속에 꽁꽁 묶여 있던 이야기 귀신들이 더 이상 숨이 막혀 참을 수 없다면서 아가씨를 죽일 음모를 꾸미기에 이른 것이란다.
과연 이야기 귀신들의 음모는 무엇일까?
이야기 귀신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엿들은 몸종은
아가씨가 딸기를 따먹으려 하자 냅다 뭉개 버리고,
아가씨가 모란 꽃 향기를 맡으려 하자 모란꽃을 짓밟아 버린다.
이도 저도 몸종 때문에 실패하자
이야기 귀신들이 신방에 구렁이로 나타나 아가씨를 죽이려 드는데….
몸종은 이 마지막 음모를 막을 수 있을까?
무시무시한 이야기 귀신에다, 길다란 혓바닥을 낼름거리는 구렁이를 보니 등골이 쏴아 해지지 않는가!
이야기를 좋아하지만 다른 이들에게 전해주지 않고, 차곡차곡 이야기 주머니에 쌓아두기만 하는 아가씨 때문에 이야기 귀신들이 잔뜩 화가 나서 아가씨를 죽일 음모를 꾸민다는 설정은 모름지기 ” 이야기는 한 곳에 쌓이는 게 아니라 흘러가야 한다”는 우리 조상들의 생각을 잘 전달해 주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주제가 명확한 이야기에다 보기만 해도 미소를 머금게 하는 아름다운 한국화 그림은 보는 내내 더위를 잊게 만든다. 이야기 귀신들이 음모를 꾸미는 장면에 나오는 갖가지 청색들은 보면서 귀신들의 모습이 조금 무섭기는 하지만 덕분에 시원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 조상들이 이 아가씨처럼 이야기를 쌓아만 놓고 남에게 풀지 않았다면 이렇게 재미 있는 이야기들을 우리가 어찌 전해 들었겠는가? 조상들은 여기에 나온 몽종처럼 재밌고 슬프고 웃긴 이야기를 들은 즉시 누구에게든 이야기를 전해 줬기에 구수한 누룽기 같은 옛이야기들이 지금 우리 곁에 남아 있지 않았겠는가? 그러니 어린이 여러분들도 내가 아는 재밌고, 무섭고, 슬픈 이야기들을 혼자만 알지 말고,누구에게든지 전해 주길 바란다. 안 그러면 이야기 귀신들이 또 작당을 하고 여러분을 괴롭힐 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