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중학교 무렵까지 시골에서 자랐다. 아직도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를 쓰는 마애삼존불의 고장에서 정월대보름에는 쥐불놀이를 하고 여름에는 논 샛길을 걸어서 오디를 따러 다니는 시골 소녀였다.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나는 풍경 중 하나가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갈 때쯤 논과 논 사이의 제대로 포장되지 않은 콘크리트길을 횡단하는 애벌레들의 행진이다. 지금도 왜 애벌레들이 그렇게 집단을 이루어서 길을 건너야만 했는지는 이유를 모르겠지만 어린 눈으로 그건 징그럽기도 하면서 눈을 뗄 수 없는 자연의 신비였던 것 같다. 개구리 알이나 부레옥잠 같은 초등학교 저학년 자연 책에 나올법한 것들은 흔하디흔했다. 봄에는 엄마를 따라 논둑에 난 나물을 캐고 여름의 비가 많이 오는 날엔 동네 언니 오빠들과 함께 학교괴담을 흉내 내느라 운동장 한가운데를 파고 나온 분필가루를 뼛가루라며 겁에 질리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을 정도로 사소한 것들을 하며 자랐지만 그래도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다는 것을 큰 축복으로 여긴다. 시골의 때 묻지 않은 자연을 만끽하며 자랄 수 있게 해주신 부모님께 무척이나 고마움을 느낀다. 사람의 손이 많이 가지 않은 자연에서만 얻을 수 있는 순수함은 나와 평생 함께하기 때문이다. 작년에는 마음이 잘 맞는 친구와 어렸을 때는 관심도 없었던 내 고장의 명물 마애삼존불을 뵈러 다녀왔는데 거의 10년 만에 방문하는 고향의 달라진 모습에 마음이 시리기도 했다. 내가 도시로 전학을 갈 때 쯤 근처에 서해안고속도로가 들어서면서 근처 도시처럼 발전할 것이라는 지역사람들의 기대가 컸지만 안타깝게도 지역에 크게 도움이 될 만한 변화는 없었던 것 같다. 단지 정겨웠던 풍경이 어설프게 도시화되어서 내가 맨발로 다니던 논둑은 없어지고 아스팔트의 널따란 길이 들어서고, 철마다 아름답게 꽃이 둘러쌌던 ‘국민학교’의 담장은 허물어져있었다. 친구의 부모님이 운영하던 세탁소는 현대식 편의점으로 바뀐 지 오래돼 보였다. 그래도 내가 조금 안심했던 것은 길을 물으러 들른 면사무소 젊은 직원의 ‘저기 옆에 있어유~’ 하던 구수한 사투리였다. 진성 충청도 사투리를 쓰는 젊은이라니!
<뿔, 뿔, 두꺼비 뿔>의 주인공 종민이는 아토피를 앓는 흔한 도시의 어린이다. 부모님이 미국에 잠시 떠나는데 종민이는 아토피가 심해져서 삼촌과 함께 시골 할머니 집에 머무르게 된다. 종민이네 엄마는 더러운 것이라면 질색하지만 삼촌은 청소도 잘 안하고 땀내가 풀풀 나는 아저씨다. 게다가 시도 때도 없이 종민이를 아기라고 놀리는 바람에 가뜩이나 무서운 것들이 잔뜩한 시골집의 생활이 험난하기만 하다. 그런데 어느 날은 삼촌이 솔깃한 이야기를 해준다. 할머니 집에는 나이가 백 년도 넘는 업두꺼비 한 마리가 사는데 그 두꺼비 머리 위에 난 뿔을 먹으면 귀신도 물리칠 수 있을 정도로 용감해 진다는 것이다. 영 거짓부렁 같지만 종민이는 반신반의하며 버섯처럼 생긴 두꺼비 뿔을 열심히 먹는다. 과연 종민이는 시골집에서 혼자 불도 끄고 잠들 수 있을 정도로 용감해 질 수 있을까?
남자아이들은 대여섯 살쯤에 접어들면 힘이 무척 세고 용감한 것에 대해 굉장한 동경심을 갖는다. 가령 공룡이라든가 파워레인저라든가 실재하지 않더라도 어쨌든 자기들 눈에 크고 강한 것이 최고다. 아마 자신은 아직 작고 모르는 것이 많고 약하다는 것을 점점 인지하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뿔, 뿔, 두꺼비 뿔>에서 종민이는 대략 8, 9살 정도 되어 보인다. 어른들이 하는 말을 다 믿지는 않지만 아직도 귀신과 어둠이 무섭고 그럴싸한 말에 속아 넘어간다. 종민이를 열심히 놀리는 삼촌도 한때는 종민이 같았을 것이고 나 또한 종민이의 두려움에 나의 옛날이 많이 생각났다. 괜히 창문이 바람에 흔들리면 귀신이 들어온 것만 같고 방문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면 괴물이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 것만 같고… 나의 유년시절을 새록새록 생각나게 하는 대목들에 읽는 내내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더랬다. 더불어 홍미현님의 그림은 그 아득했던 시절을 고대로 보여주는 것만 같다. 특히 삼촌의 지령(?)을 수행하는 종민이의 ‘나홀로 첫날밤’ 장면은 최고다. 이곳저곳에서 나를 노리는 것만 같은 미지의 것들에 대한 공포감은 종민이의 표정에서 여실히 느낄 수 있다. 다소 싱거웠던 종민이의 소박한 모험들은 오히려 현실적이다. 두꺼비 뿔을 열심히 먹은 종민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혼자 불을 끄고 잘 수 있는 것도, 지네각시나 도깨비를 잡은 것도 아니지만 어린 소녀, 소년에게는 작은 용기가 커다란 도약이 된다는 것을 나는 알기 때문이다. 더더욱 반가운 일은 시골에서 열심히 뛰어 놀은 덕에 종민이의 아토피가 마법처럼 깨끗이 사라진 것이다.
도시의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무엇을 기억할까? 높은 건물들의 불빛과 자동차 경적소리, 별인 척 하는 위성과 비행기 불빛쯤이려나. 요즘의 아이들이 마음속에 자신만의 우주 하나쯤 품지 못한 채 어른이 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아마 두꺼비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를 아이들. 그런 면에서 김진경 작가의 <뿔, 뿔, 두꺼비 뿔>은 요새 아이들이 꼭 읽었으면 하는 작은 성장기이다. 종민이의 입장에서 풀어나가는 책에서 과연 요즘 어린이들이 이런걸 알까 싶은 의아한 단어들이 종종 나오는 점은 아쉬웠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단연코 추천할 만하다. 특히 아이가 너무 소심해서 걱정인 부모들에게는 강력 추천이다. 많은 부모님들이 팽이버섯을 잔뜩 넣은 된장찌개를 밤마다 끓여야할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