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데!
고작 해 줄 수 있는 게 네 옆에 앉아 호흡을 함께 하고 네가 울 때 가만가만 등을 토닥여 주는 것 뿐이어서 정말 미안해. 하지만 약속할게. 두 눈 똑바로 뜨고 인간의 광기가 이 세상을 활보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섣불리 용서라는 말도, 희망이라는 말도 하지 않을게.
절대 잊을 수 없겠지만, 잊어서도 안 되겠지만 과거 속에 너를 가두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넌 ‘잔 다르크’처럼 죽음의 늪에서 살아온 불굴의 투사이자 ‘우무비에이’라는 이름처럼 생명을 선사하는 아프리카의 딸이니까.
<천개의 언덕>은 1994년 4월부터 7월까지 아프리카의 르완다에서 벌어진 ‘대학살 사건’을 다루고 있다. 오랫동안 함께 살던 이웃들이 고작 백일 만에 정글 칼과 몽둥이로 서로를 죽인 숫자가 백만 명이 넘는다. 후투족과 투치족!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보이는 데로 서로를 무참하게 도륙했다.
‘잔 다르크 우무비에이’
‘잔’이라고도 부르고 ‘데데’라는 애칭으로도 불리던 소녀는 눈 앞에서 머리가 깨진채 죽어가는 엄마를 봐야 했고 얄밉다고 눈 흘기던 여섯 살난 동생을 폭탄이 터지던 주민 회관 속에 남겨 두고 도망쳐야 했다. 재앙을 예고라도 하듯 대통령이 탄 비행기가 폭격을 당하고 그 끔찍한 음악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순간 평화롭던 ‘키분고 마을’은 순식간에 풍비박산이 나버렸다. 시민들을 책임져야 하는 시장이 오히려 시민들을 버리고 투치족의 집단 학살 현장을 묵과한다.
왜 나만 살아 남은 것일까?
오빠 ‘장도’의 신발 한짝을 숨기느라 장난치던 시간은 이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침대 밑에서 끌려나와 광장에서 몽둥이에 맞아 죽어 가던 오빠를 보던 잔은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다. 비명도 지를 수 없다. 울음도 비명도 꽁꽁 얼어붙어 꼼짝을 할 수 없었던 소녀…
르완다는 후투족이 84퍼센트, 투치족이 25퍼센트, 트와족이 1퍼센트로 이루어진 나라다. 15세기경 유목민 출신의 투치족이 농경 생활을 하던 후투족을 흡수하며 지배하기는 했지만 오랜 시간을 거치며 두 부족은 갈등 속에서도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며 잘 살아 나갔다. 하지만 서구 제국주의의 힘이 미치면서 두 부족은 식민지 열강의 ‘분열 정책’에 말려들며 서로를 미워하고 증오하게 된다. 두 부족을 이간질 시키면 자기네들끼리 싸우느라 독립은 뒷전일 거라는 교묘한 술수에 놀아난 것이다. 벨기에는 당시 지배 계급인 투치족을 우대하고 후투족을 차별함으로써 갈등 관계를 조장한다.
그렇게 바라던 ‘독립의 날’이 왔지만 ‘또 다른 전쟁’이 기다리고 있을지 누가 알았을까?
한국 전쟁 때 남북한이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었던 것처럼 부족 간의 전쟁은 엄청난 희생을 치르며 후투족과 투치족의 관계를 역전시킨다. 그 후로 다시 권력을 찾으려는 투치족 반군과 내어주지 않으려는 후투족 정부군 간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벌어지고 ‘민족 대학살’이라는 엄청난 비극을 불러오게 되었으니…
‘한나 얀젠’은 14명이나 되는 아프리카 아이들과 다문화가정을 이루며 글을 쓰고 있는 작가다. 그녀 역시 세계 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그림자에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일까? 말도 통하지 않는 ‘잔’을 이 먼 곳까지 데려 오며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잔’의 상처를 치유하는 길이 자신을 회복시키는 길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꿈 속까지 따라오던 그 날의 기억을 입 밖으로 꺼내기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혼자 살아 남았다는 죄책감에 몸서리 쳐야 했던 소녀의 아픔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진다. 하지만 작가이기 이전에 ‘잔’의 엄마로 함께 고통을 나누고자 했던 ‘얀젠’의 뜨거운 기다림이 있었기에 ‘잔’은 동굴 속에서 힘겨운 발걸음을 떼기 시작한다.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이 세계의 차원과 양극, 즉 처음과 끝은 실은 우리 자신의 한계가 만들어 낸 거야.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뛰어넘어 앞으로도 끊임없이 전진할 거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 해. 하지만 난 확신해. 시간은 결코 앞으로 뻗어가는 화살이 아니라는 걸. 시간은 원이야. 삶과 죽음의 원리로 돌아가는 원이지. -본문 486 발췌-
왜 사람들은 시간이 끝없이 직선으로 뻗어 나간다고 믿는 걸까?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엄청난 일들이, 내 편이 아니면 곧바로 적이라는 극단적인 ‘양극화’가 누군가의 가슴에는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아 꼼짝없이 과거에 붙들려 있게 하는데도 말이다.
어쩌면 우리가 매순간 살아가고 있는 시간이라는 개념 역시 인간들이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어제와 오늘, 오늘과 내일이라고 구분짓는 것 또한 시간의 흐름을 직선에서 바라본 사람들의 논리일테니까… 오히려 시간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삶과 죽음의 원리’로 맞물려 있다는 작가의 말에 공감을 하게 된다. 누군가는 죽지만 누군가는 살아 남아서 끝없이 반복해야 하는 동그란 원…
‘잔’은 살아 남았다. 살아 남은 시간을 고통 속에서 보내는 것도 행복하게 보내는 것도 ‘잔’ 스스로의 선택이지만 결코 그 굴레가 녹녹치는 않으리라.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리기도 하지만 ‘홀로코스트’ 같은 ‘집단적 광기’를 보일만큼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에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분위기만 조성된다면 이보다 더한 비극이 재현되지 말라는 법도 없을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심스레 ‘희망’이라는 이름을 얘기하고 싶다. 살아남은 ‘잔’이 곧 희망이듯이 그녀가 무언가를 이루리라 믿어서가 아니라 그 고통을 견디며 살아 남았기에 희망이 아닐까? 생명이란 이토록 눈물겨운 존재가 아닐까?
<천 개의 언덕>을 넘어 온 ‘잔’에게 어떤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다. 때로는 그 언덕들이 커다란 산으로 자라나 앞을 가로 막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로지 살기 위해 걷고 또 걸었던 그 걸음이 ‘삶의 길’로 인도해 주었듯이 ‘잔’의 손을 놓치 않으리라 확신한다.
삶이란 때로는 험하고 거친 언덕을 천 개나 넘어야 하지만 그 언덕 너머에 있을 태양을 바라보기까지 참고 견디며 살아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귀한 시간이었다. 쉽사리 포기하고 때로는 순간의 어리석은 선택으로 생명을 져버리는 청소년들에게 삶이란 이렇게 치열하고 아름다운 것임을 가르쳐준 뜨거운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