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은 항상 그래. 뭐든지 멋대로 만들고, 멋대로 끝내.
우리가 어른이 되면 말이야, 좋아하는 것을 실컷 만들어서 매일매일 목요일처럼 반짝반짝 빛나게 하자.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절대로 끝내지 않는 거야. 약속하는 거다.”
모노톤의 단조로운 일상 속의 어느 날에, 색을 입힌 것 같이 반짝이는 시간들을 가져본 적 있다. 꾸밈없이 진실할 수 있는, 내가 가장 나다울 수 있는 시간 말이다. 기미에의 말처럼 그런 시간들이 절대로 끝나지 않는다면 참 좋겠지만 내가 저 구절에서 씁쓸히 웃었던 건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던 걸까. 우리는 그 반짝이는 시간들을 잃었을 때 조금 더 성장하는 것 같다. 그리고 여기에, 바로 그런 아이들의 이야기가 세 편 있다.
<어린이는 잠잔다>의 ‘나’는 매 해 여름이면 사촌들과 함께 아키라 형의 별장에서 여름휴가를 보낸다. 이번에도 그 여름휴가가 왔다. 별장의 주인이자 제일 맏형인 아키라형의 지시에 따라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바닷가에 가고 밤 11시가 되면 어김없이 아키라 형이 좋아하는 클래식을 들어주어야 하는 생활은 즐겁다. 그리고 ‘나’와 사촌들은 이 즐거운 방학을 내년에도 이어가고 싶은 마음에 아키라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아키라보다 뭔가를 잘했거나 아키라의 말에 반대하거나 했던 사촌은 다음 해에 별장에 초대받지 못 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일부러 아키라에게 수영시합을 져주고, 아키라보다 키가 큰 도모아키는 허리를 구부리고 새우등을 하고 다니며, 영어를 잘하는 나스는 발음을 잘 못하는 척 뚝뚝 끊어 읽기까지.. 아키라 형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는 모습들은 우습기도 하고 귀엽다. 슈만의 ‘어린이의 정경’도 지루한 것도 참고 함께 들어주는데, 물론 다들 끝까지 못 듣고 잠들긴 한다. 그렇지만 점점 아키라에게 불만을 가지게 되고 그의 말을 더 이상 따르지 않는다. 결국 다음 해 별장에서의 휴가는 약속할 수 없게 되지만, 별장에서의 마지막 밤 ‘나’는 아키라가 클래식을 좋아하게 된 사연을 듣게 된다. ‘나’는 그 날 밤 졸지 않고 ‘어린이의 정경’을 끝까지 듣는다. 그리고 잠든 사촌동생들을 안고 직접 침대로 옮겨주는 아키라를 보고 깊이 깨닫는다.
<그녀의 아리아>는 모리 에토가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모티브로 해서 쓴 이야기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바흐가 불면증을 앓는 지인을 위해 만든 곡이기도 한데, 이 이야기에 이유 모를 불면증에 걸린 소년 ‘나’가 나온다. 그 날도 잠을 못자서 정신이 몽롱한 상태로 구 학교 건물 음악실에 가게 됐는데, 그 곳에서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치고 있는 후지타니라는 소녀를 만나게 된다. 후지타니는 나의 병이야기를 듣더니 자신도 불면증이라고 하며, 이유는 가족문제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자신과 같은 병을 앓는다는 후지타니에게 큰 위로를 받고, 둘은 매주 그곳 음악실에서 만난다. 후지타니를 만나면서 ‘나’는 불면증이 사라졌지만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계속 음악실에 가고, 후지타니 역시 가족 이야기를 거짓으로 지어내서 해준다. 나중에 후지타니가 불면증이었다는 것도, 그녀의 가족 얘기도 다 거짓말이었다는 걸 알고 ‘나’는 충격을 받고 둘의 관계는 잠시 어긋나버리는데..
후지타니는 언제나 온 힘을 다해 거짓말을 했어. 자신의 모든 힘을 나에게 다 주려는 듯이,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거짓말을 필사적으로 했어. 자신을 위한 거짓말은 하나도 없었어. 졸업식 전날, 내 마음은 어느 정도 누그러졌지만 화해할 생각은 없었다. 하긴 거기까지 이르는 데에도 방해물이 너무 많았다. 고집이며, 자존심이며, 여전히 풀리지 않은 분노와 마음의 상처…. 그 모든 것이 고리처럼 이어져 마임마임을 추듯이 내 주위에서 왁자지껄 소란을 피웠다.
그렇게 내적갈등을 하다가 (마임마임을 추듯이 라고 표현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결국 ‘나’는 후지타니를, 거짓말까지도 너그럽게 이해해주게 된다.
이해. 어쩌면 이 책은, 내가 누군가에게 들은 적 있는 ‘이해보단 인정’이라는 말을 가르쳐주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는 책 속에서가 아니라 실제로 만난다면 좀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는 인물들이 많이 나온다. 독불장군 같이 자신이 좋아하는 클래식을 동생들에게 강요하는 아키라. 전교에 소문난 거짓말쟁이 후지타니. 그리고 여기엔 줄거리를 적지 않았지만 <아몬드 초콜릿 왈츠>의 기누코 선생님이나 사티 아저씨, 기미에같은 사람들도 참 특이한 성격이다. 아몬드 초콜릿 왈츠에 이런 구절이 있다.
‘다른 아이들은 선생님을 ‘별난 사람’으로 여기고 선을 그어 버렸지만, 기미에는 달랐다. 있는 그대로 즐길 줄 알았다. 그런 점에서 나와 마음이 잘 맞았다.’
인간관계에서 특히 이해보단 인정이라는 말에 공감할 때가 많다. 이해하기 힘든 사람. 그 사람의 이해하기 힘든 성격. 이해하기 힘든 습관. 이해하려고 애쓰지말고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면 한결 편해지고 행복해진다는 말인데 그 말이 쉬운 듯 하면서도 어려웠다. 그런데 이 책의 인물들은 그걸, 잘해낸 것 같다. 바로 그 점이 저마다 다른 이 세 소설을 한 데로 묶어주는, 묘하게 일치하는 부분인 것 같다.
그리고 그런 교집합이 하나 더 있다면 말이다. 별장, 음악실, 그리고 매주 목요일밤 왈츠를 추던 피아노 교실까지 세 주인공들은 모두 특별한 공간을 가졌고, 이야기의 끝에 가서는 그 공간을 잃는다. 머지 않아 셋 모두 아 그건 아름다운 추억이었구나- 라고 회상하게 될 날이 올거다. 그리고 그걸 ‘아름다운 추억’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날, 더 이상 그 공간을 잃었다는 사실이 아프지 않은 날에 비로소 자신들이 한뼘 더 성장하였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마지막에 아몬드 초콜릿처럼 살아가라는 사티아저씨의 작별인사는 함께 왈츠를 추던 그 시간을 잊지말고 추억으로 간직하고 살아가라는 아저씨만의 화법이 아닐까 싶다.
왈츠는 나에게 무엇을 잊어야 하고,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 가르쳐 준다. 왈츠는 말한다. 모든 걸 다 기억할 수는 없다고, 즐거웠던 일을 기억하라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기억하라고.
여담으로.. 사실 피아노곡은 잘 듣지 않는 편인데, 이 세 소설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곡들이 궁금해서 들으면서 읽어봤다. 슈만의 어린이의 정경,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에릭사티의 자질구레하고 유쾌한 담화가 바로 그 세 곡인데, 에릭사티 것 빼고는 인터넷 검색으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에릭사티의 곡은 결국 찾지 못해서 음악없이 아몬드 초콜릿 왈츠를 상상해보면서 읽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그렇게 했는데, 이야기 중에 ‘금가루’, ‘피카델리’, 소설의 제목이 된 ‘아몬드 초콜릿 왈츠’라는 곡들이 등장한다. 그래서 그건 다 읽고 나서 들어봤다. 개인적으로는 에릭사티의 금가루가 제일 마음에 들었다. 신기하게도 모리 에토 작가의 문체와 소설마다의 분위기가 각각의 피아노곡들과 환상적으로 맞아 떨어졌다. 마치 글자들과 소리가 하나인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했다. 피아노 음색이 사람의 결핍된 마음을 채워준다는 아키라의 말에 소심하게 공감해본다. 그래서 말도 안되지만 이 책을 읽고 한동안 피아노곡을 즐겨 듣기도 했다. 호불호가 많이 갈리던데 나는 괜찮게 읽은 소설집이었고, 감성을 자극하면서 가볍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을 읽어볼 사람이라면 여기 쓰인 곡들을 꼭 같이 들으면서 읽기를 추천한다.
어린이의 정경 (1~18) http://blog.naver.com/xyzkxx/10110927297
골드베르크 변주곡 http://blog.naver.com/xyzkxx/10096335774
아몬드 초콜릿 왈츠 http://youtu.be/9eA2820QOa0
금가루 Poudre D’Or, Valse (1902) – – http://youtu.be/3JzIXJwXjiw
피카델리 Le Piccadilly (1904) – – http://youtu.be/yUVlReCAA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