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작가의 책을 읽게 되면 두 가지 감정이 교차한다. 기발함과 성급함. 기성보다 남달라야한다는 억압이 기발함을 낳지만 동시에 서너 계단을 한꺼번에 뛰어오르는 성급함과 함께여서 책을 덮고 나면 그래서 신진이라는 이름이 붙는다는 걸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된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이 두 가지가 다 없었다. 시골 소년이 겪는 에피소드들은 수십 년 동안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성장 소설에 써먹은 듯 한 내용들의 연속이었다. 가난한 집에는 가장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도 힘없는 아내와 아이들을 괴롭히는 아버지의 폭력이 있고, 그 아버지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지 못하는 나약한 어머니가 있다. 아이들은 제대로 키워지지도 못한 채 도시로 돈 벌러 나가고 그 누나와 형을 기다리는 동생들이 아버지의 폭력 속에서 집을 떠날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날을 기다리는 동안 아이들은 자신의 현실을 회피하고자 상상 속으로 빠져든다. 내가 이 집 아이가 아니기를, 내 친부모가 늦게라도 나타나 나를 구원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의 불행한 현실을 부정하며 자란다. 그렇게 자라서 어른이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신이 노출된 환경과 비슷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주인공 기범은 아버지가 주는 상처에서 벗어나고자 공부를 택한다. 시골아이가 도시에 정착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기범이가 다른 형제들과 달리 도시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부모의 전폭적인 지지가 아니라 자신의 가출과 자살 소동이 낳은 혜택이었다. 기범은 가족과 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공부를 선택했고, 그 길을 간신히 걸어간다고 믿었다. 그러나 내면 깊숙이 숨어있던 가족과 집에 대한 기억은 자신의 가장 중요한 시간인 대입고사를 치르던 순간에 표출되었고 그제서야 기범은 먼저 집과 화해하고 난 뒤라야 자신의 삶이 제대로 살아질 것임을 자각한다.
가족을 끝없이 괴롭히던 아버지가 병으로 죽자 기범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아버지를 보낼 수 있었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고향집으로 돌아온 뒤 찾은 일기장을 통해 그 옛날의 기억들을 되짚으며 자신을 괴롭히기만 했던 아버지의 모습은 다만 반쪽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일기장을 통해 비로소 아버지와 집을 인정하고 화해한 기범은 이제 어떤 장애물이 와도 넘어갈 수 있는 의지를 갖게 된다. 앞으로 기범 앞에 펼쳐질 삶의 고통은 다른 사람들과 한 치 다를 바 없는, 누구에게나 주어진 넘어갈 수 있는 삶의 장애물에 불과한 것이다.
기범을 과거와 화해시킨 것은 기범의 일기장이었다. 자신의 비밀 일기장에 모든 것을 적을 수 있었기에 기범은 상처 받은 마음을 아물게 할 수 있었다. 누구나 자신의 현재를 다 말하지는 못한다. 남모르는 비밀 한 두 가지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비밀 때문에 살면서 스스로를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할 수도 있다면 이렇게 기범처럼 비밀일기장을 통해 스스로에게 숨 쉴 틈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걸 알려준다.
청소년 도서로 손색이 없는 책이다. 처음에 말한 기발함과 성급함이 없는 대신에 다 읽고 나면 기범을 통해 그 나이 또래에 누구나 받을 수 있는 예민한 상처를 치유하는 길을 모색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기범처럼 일기를 써도 될 테고 온 몸을 흔들어 드럼 채를 잡아도 되겠다. 이런 시기에 이런 아픔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그 아픔을 아물려가는 방법을 찾게 되는 것. 이것이 이 책을 읽는 청소년 독자들에게 주는 마법과도 같은 선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비룡소의 블루픽션시리즈가 점점 더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