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을 한지 10년이 넘었고 운 좋게 한 직장에서 계속 다니고 있다. 나만의 노하우도 가지고 있어 나만 할 수 있는 일이 있어 뿌듯하고 직장맘을 가진 아이들도 엄마가 집에 있길 바라긴 하지만 그래도 엄마는 회사에 나가는 걸로 알고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내가 남자였다면 더 승진이 빨랐을까 라는 생각은 조금 했지만 지금 다니는 직장엔 그런 차별이 없는지라 역시 다행이다.
‘체인지’라는 영화가 있었다. (1997년, 정준 김소연 주연) 번개를 맞아 남학생과 여학생의 몸이 바뀐 이야기. 아침이 일어나니 내가 갑자기 남자가 혹은 여자가 된다면 얼마나 황당할까? 그래도 둘은 서로 바뀐 걸 알고 있어 다행인데 여기 아무런 이유도 없이 소녀가 된 한 소년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빌 심프슨은 잠에서 깨어보니 여자아이가 되어있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 엄마는 분홍원피스를 머리 위에서부터 뒤집어씌우더니 지퍼를 올려주고 급히 출근한다. 아빠도 늦었는지 예쁘다며 한마디 하고 가신다. 고양이 벨라도 변함없이 빌의 발목에 몸뚱이를 비비며 가르랑거린다. 학교에서도 빌이 여자임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자 왜 아무도 이상하다는 걸 모르는지 이 악몽이 언제 끝날지 답답하고 궁금하다.
학교에 조금 늦었지만 교장선생님은 다른 학생들에겐 잔소리를 하면서도 빌에겐 어서 오라고 하고, 쓰기 시간에는 이전보다 글씨를 잘 썼지만 또박또박 쓰라고 야단을 맞고, 읽기 시간에 15년 동안 왕자님만 기다리는 라푼젤이 답답해서 한마디 했지만 선생님도 아이들도 빌의 항의를 이해하지 못한다. 쉬는 시간에 여느 때처럼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축구를 하고 싶지만 원피스를 입었기에 참았다가 아이들의 내기에 선뜻 응하고 운동장에 나가지만 ‘너희 땅에서 놀지 왜 방해하냐’는 항의를 받는다.
미술시간엔 다른 미술도구들이 못 쓰게 되고 분홍색 물감만 있자 분홍 원피스를 입은 빌이 모델이 되고, 선생님 심부름으로 보조열쇠를 가지고 행정실로 가는 길에 교장선생님의 부탁으로 유리로 된 작은 잉크병을 받고, 보건 선생님이 알파벳 순서로 정리한 건강기록부를 한아름 받고, 그것도 모자라 관리인 아저씨는 테니스 공 일곱 개를 서류 위에 올려주고 가버린다.
주머니도 없는 옷을 입고 조심조심 걷는데 행정실 앞에서 와장창.. 하늘하늘 예쁜 원피스라니!
불평을 하고 싶었지만 생각을 고쳐먹고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 봤자 소용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빌이 무슨 말을 하건, 무슨 짓을 하건 이 황당한 날은 꿈처럼 제멋대로 계속 흘러갈 게 뻔했으니까. 49페이지
만화책을 읽다가 로한과 말다툼을 하게 되고 급기야 치고 받고 싸우는데 선생님은 빌이 로한의 어깨를 치긴 했어도 빌의 치마엔 로한의 발자국이 찍혔기에 빌보다 로한에게 더 화를 낸다. 친구들은 로한에게 ‘너 무지 열 받았구나’ 라고 속삭이지만 빌에겐 ‘너 무지 속상해 보여’라고 한다. 선생님은 날이 개자 아이들에게 달리기 시합을 시키는데 여자아이들은 몸이 불편한 폴이 1등 하게 만들자며 일부러 져주라고 한다. 아이들이 차례차례 실수인척 넘어지고 뒤로 쳐지고 폴은 흐느적 거리며 다가오는데 이상하게 빌은 멈추지 않고 결국 1등을 하고 여자아이들의 핀잔을 받지만 처음으로 2등을 했다는 폴의 말에 빌을 용서한다.
집에 돌아와 흙먼지 자국이 묻고 물감 얼룩도 있고 찢어지고 신발 자국도 나고 풀물까지 들어 지저분해진 옷을 본 엄마는 다시는 원피스를 입히지 않겠다고 한다. 빌은 셔츠와 청바지로 갈아입고 거울을 보며 이제 다 끝났으니 꿈이든 아니든 상관없다고 고양이 벨라에게 속삭인다.
원피스를 아니 치마라도 입으면 행동이 조심스러워진다. 뛸 때도 조심해야 하고 특히 계단을 오를 때는 정말 신경 쓰인다. 어른인 나도 불편한 원피스를 하루 종일 입은 빌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원피스로 여자아이를 상징하는데 여자아이의 하루를 산 남자아이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여자와 남자의 다른 모습을 꽤 구체적을 보여준다. 너희 땅이라는 단어도 그렇고 여자는 글씨를 또박또박 쓰는 게 당연하고 라푼젤처럼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왕자님만 기다려야 하며 원피스를 입으면 절대 더럽히면 안 되고 남자아이들은 쉬는 시간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할 때 여자아이들은 방해하면 안 되고 등.
옮긴이의 말을 보니 우리도 그랬듯이 이 책이 영국에 처음 나온 1989년에는 여자와 남자는 달라야 한다는 틀에 박힌 생각들이 더 강했다고 한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서로를 이해하기 힘들다. ‘빌의 이야기가 여러분에게 남자와 여자의 마음가짐과 행동이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보고 이해할 기회를 마련해주었으면 좋겠어요.’
우선, 집에 오면 TV부터 켜는 남편이 못마땅하지만 이해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