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이 나타났다
비룡소 “난 책읽기가 좋아”시리즈 중 독서레벨 1단계는 책을 혼자 읽기 시작하는 아이들을 위한 동화로 꾸려져 있습니다. 1단계의 제 24권, <괴물이 나타났다>를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 여러명, 그리고 유치원생들에게 읽어주었네요. 이제 막 한글에 눈 떠가는 유치원생에게도, 혼자서 책 읽는 재미를 아는 초등학생에게도 충분히 재미와 교훈을 주는 책이랍니다.
밭에서 안경을 잃어버린 두더지 아줌마의 호기심으로 토끼 그림자가 무시무시한 가공의 괴물로 구체화되어가는 이 이야기는 아이들이라면 모두 좋아할 <커다란 순무>처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점증법의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두더지 아줌마가 호들갑을 떨며, 개구리 부인에게 전하고, 다시 개구리 부인은 거위 선생님께, 거위는 다시 노루씨에게, 노루씨는 멧돼지, 최종적으로 멧돼지 씨는 토끼에게 괴물의 위험을 경고하지요. 물론 눈치 빠른 독자라면 짐작하겠지만 그 “듣도 보도 못한 끔찍한 괴물”이란 건 사실 토끼였고요.
<괴물이 나타났다>의 동물 캐릭터들은 각각 땅과 하늘 늪, 숲 등 공간적 배경을 달리하며 등장하여 소문 꼬리 물며 내기로 독자들에게 재미를 줍니다. 마찬가지로 이들 사이에서 릴레이하듯 소문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괴물의 묘사에 하나씩 형용어구가 추가되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처음엔 그저 “귀가 무지 크고 뾰족한 괴물”이었다가, 소문에 소문이 돌면서 맨 마지막에 다시 토끼 귀로 이야기가 들어갈 때쯤이면 “귀가 뾰족하고 어마어마하게 큰 입에서는 침이 질질 흐르고, 이빨은 칼날 같은 데다 눈으로는 불을 뿜어내는 듣도 보도 못한 끔찍한 괴물”이 되지요. 여러번 읽을 수록 언어유희가 재미나게 느껴지는지 아이들이 여러차례 반복해서 읽는군요.
데이지 꽃을 발견한 토끼가 평화롭게 유유자적 꽃을 뜯어먹으려던 게 사건의 발단이었어요. 아니, 밭에서 일하던 두더지 부인이 안경을 잃어버린 것이 발단이었다고 해야할까요? 지독한 근시안인 두더지 부인은 토끼의 형상을 보고 괴물이라며 호들갑 떨고 달아났어요. 혼자서만 알고 끝나지 않았죠. 근원을 알 수 없는 사명감에 불타올랐는지 개구리 부인에게 괴물 소문을 내었어요. 이렇게 해서 괴물 소문 꼬리 물기가 시작 된것이지요? 동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소문은 진원지에 대해 더 탐구하고 곰곰 생각해볼 여지도 없이 부리나케 도망간답니다. 호들갑을 피면서 말이지요.
자신의 형상이 소문 속 “듣도 보도 못한 괴물”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하는 토끼는 “그런 괴물 못 봤는데요.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요!”라 합니다. 놀란 토끼의 뒤로 귀가 무척이나 뾰족하고 긴 그림자가 보이네요.*<괴물이 나타났다>는 읽기의 즐거움에 더해 진실을 왜곡하고 과장하려는 심리적 속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합니다. 흑백영화이자 SF의 고전 <금단의 행성>에서 뿐 아니라 많은 SF영화 속에서 사람들을 괴롭히던 괴물들은 결국 그들의 망상이나 마음속 괴물이라는 설정이 자주 등장하지요. <괴물이 나타났다>를 아이와 보면서 SF영화 몇 편이 떠올랐어요. ‘적, 괴물은 결국 마음 안에 있다. 마음을 다스려라’하는 교훈과 함께. 결국 두더지니 개구리니 멧돼지 모두 실체도 없는 괴물, 자기 마음 속에서 상상하고 존재하는 것으로 살을 붙인 괴물 때문에 두려웠던 것이지요. 어린이 독자들은 마음이 굳세고 씩씩하게 자라기를 바랍니다.
*1학년 아이에게 <괴물이 나타났다>의 점증 구조를 생각해보도록 유도하기 위해 일부러 “상상 속의 괴물은 어떻게 변해갔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더니, 아이는 그림으로 표현해버렸네요. 괴물 머리가 점점 커지고 귀가 더 길어졌네요. 나름 꼬리 물기 정리를 열심히 했는데, 옥의 티 발견! 멧되지씨라니요? 그래도 참 잘 정리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