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기대했던 탓일까, 10분도 안되서 손에서 책을 놓아버렸다. ‘안나’라는 아이의 시점으로 잔잔하게 진행되는 이야기가 나는 도통 끌리지 않았다. 불타오르는 호기심으로 읽기 시작하니 금세 흥미가 떨어져버렸다. 느릿하고 조용한 전개에 내 머릿속조차 달팽이가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 뒤에 이 책에 대한 정보를 한창 수집하던 중, 나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이 책 끝에 엄청난 반전이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렇게 나른한 이야기 속에 무슨 반전이 있다는 것인가? 라는 호기심에 꼭 읽어내고 말겠다는 오기로 나는 다시 책을 펼쳐들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었다. 단순히 영화의 원작이라는 사실로 잔뜩 흥분해서 읽었을 때와, 온전히 이 책 자체를 알고 싶어져서 다시 읽었을 때, 그 둘은 현저히 차이가 났다. 지루하게만 느껴졌던 이야기를 계속 읽다보니 주인공 ‘안나’에 천천히 녹아들기 시작했고, 결국 이야기가 절정에 치닫을 때는 내가 안나 자신이 되기라도 한 듯이 푹 빠져서 읽었다. 그토록 궁금했던 ‘반전’을 알았을 때는 너무 놀라워서 집안일하던 엄마를 붙잡고 마구 말을 쏟아내기까지 했다. 막연하게 예상했지만 전혀 예상치 못했던 그 반전은 예리하게 내 머릿속을 관통했다. 대부분의 책들처럼 막장, 혹은 슬프고 충격적이지 않고, 절로 마음이 따뜻해진듯이 느끼게 해줘서 더욱 좋았던 것 같다. 이 ‘반전’을 위해서라도 이 책을 읽어보기를 추천하고 싶다.
<추억의 마니>. 언뜻 들으면 묘하게 촌스럽기도 하고, 첫사랑의 향기를 품은 듯한 제목의 이 책은, 두 소녀 ‘안나’와 ‘마니’의 사랑스런 우정을 다룬 이야기다. 늘 겉돌기만 하고, 무엇이든 의욕이 없었던 외톨이 소녀 ‘안나’는 자신을 키워준 고모를 잠시 떠나 리틀 오버턴이라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시골마을로 향한다. 그곳에서도 여전히 외톨이고, 이상한 아이로 취급받던 안나는 혼자 해안을 거닐다 저택 하나를 발견한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을 주는 그 저택을 유심히 과찰하던 안나는 그곳에서 금발의 여자아이 ‘마니’를 만나게 된다. 비밀스럽고 신비한 소녀 마니는 남들과는 달리 안나를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둘은 친하다 못해 사랑할만큼 소중한 친구가 된다. 그 과정에서 안나는 마니를 사랑함으로 인해 자신의 마음 깊숙한 곳에 남아있던 상처도 서서히 아물어간다. 그렇게 아무도 모르는 우정을 쌓아가던 둘에게도 시련이 닥치고, 둘은 영영 헤어지게 된다. 시간이 흘러 안나는 마니의 존재를 거의 잊어버리고, 또다시 사귄 린제이네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중,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하는데…
두 명의 어린 소녀가 노는 모습을 읽어내려가다보면, 가끔 피식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진지하다 못해 엄숙할 정도로 서로를 사랑하는 둘의 우정이 풋풋하고 귀엽기 때문이다. 요즘 애들은 스스럼없이 욕을 하며 노는 친구를 베프로 여긴다고 하던데, 이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어쩜 이렇게 순수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점점 잊혀져가는 ‘우정’의 의미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할 기회도 되었던 것 같다. 이 책은 아까 말한 것처럼 너무 잔잔하게 이야기가 흘러가서 갑자기 안나가 활발한 아이가 된다던가 하는 묘사는 없다. 그렇지만 초반부의 안나와 마지막장의 안나를 비교하다 보면 아, 이아이가 드디어 자랐구나, 마음의 문을 연거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더욱이 책에 삽입된 일러스트를 보아도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거지소녀처럼 부스스하고 음침했던 꼬마가 얼굴을 훤히 드러내고 웃는 모습은 가히 감동적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영화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 책을 집어들었지만, 내려놓았을 때의 나는 어느세 영화같은건 저 멀리 뒤편으로 보내버리고 온전히 안나의 감동적인 성장기에만 심취해있었다. 그처럼 이 책은 묘하게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읽다보면 어느새 맑고 잔잔한 물결에 몸을 싣고 흘러가는 듯란 기분이 든다. 지브리가 이 책의 은은한 감동을 잘 전달해줬더라면 좋을 것 같다.
+ 제일 좋았던 글귀
When Marnie was there.
제목이다ㅎ^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