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현 작가님의 그림을 좋아하는 아이가 <칠판에 딱 붙은 아이들>을 읽고 나더니 “재밌다”며 호들갑입니다. ‘어서 읽어보라’며 재촉하지만, 딱지치기에 재미들인 아이가 황급히 써놓은 독후감만 보아서는 내용이 잘 짐작 가지 않습니다. 몇 장 넘겨보니 동갑내기 기웅이, 동훈이 민수의 우정 이야기인가도 싶습니다. 나란히 박씨 성을 가진 절친이라 하여 ‘세박자’라는 별명을 가졌다고 하니 말입니다. 친구끼리 티격태격한다거나 담임선생님께 꾸중을 듣는 등, 초등학교 교실의 일상을 현실적으로 그린 동화인가 싶더니 갑자기 SF 분위기를 띠며 급반전이 옵니다. 청소당번인 세 아이가 교실 칠판을 닦다가 손바닥이 모두 칠판에 딱 달라붙었다 하네요. 비유도 과장도 아닌 말 그대로 세 아이, ‘세박자’의 여섯 개 손바닥이 칠판에 딱 붙어버렸다니 담임선생님뿐 아니라 독자까지 당황스러워질 수밖에요.
예상할 수 있듯이, “칠판에 손 붙는” 전대미문의 사건은 가장 먼저 교장선생님께 보고됩니다. “B사감과 러브레터”의 B사감을 연상시키는 교장 선생님은 아이들을 걱정하기보다는 담임선생님을 비롯한 세 아이를 혼내기에 급급합니다. “뭐든지 자로 잰 것처럼 딱딱 맞게 가르쳐야 애들이 딴 생각을 안” 한다는 궤변과 함께 말입니다. 담임선생님은 교장의 지시에 따라 “자로 잰 듯 정확히, 빨리빨리” 세 아이의 부모님과 119에 연락을 취합니다. 자, 이제 부모님을 위시하여 어른들이 모여들었으니 “칠판에 손 붙는” 문제가 곧 해결될까요?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손은 여전히 칠판에 딱 붙어 있습니다. 제 3장의 소제목인 “다른 꿈을 꾸는 사람들” 만큼이나 오로지 자기 세계에 빠져있는 어른들은 현장에 도착했어도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심지어 기웅, 동훈, 민수의 부모님조차 말입니다. 전직 씨름 선수였다는 민수 아빠가 제아무리 힘을 써도, 방송국 리포터인 동훈이 엄마가 “칠판에 손 붙는” 사건을 소재로 특종 인터뷰 생방송을 진행했어도, 기웅이 엄마가 기웅이를 힐난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설상가상, 구급대 반장이나 학교를 지은 건설회사 대표 역시 문제 해결에 의지를 모으기보다는 책임 회피의 궤변 늘어놓기에 급급합니다. 만능 박사라는 나유식 박사는 자기 자랑이나 하고, 스님은 목탁을 두드리고, 민수 할머니는 무속인을 모셔와 난리법석을 떠는 사이 세 아이는 그만 바지에 오줌을 쌀 지경이 되었지요. 이쯤 해서 <칠판에 딱 붙은 아이들>을 쓴 최은옥 작가의 집필 의도가 서서히 그려집니다. 작가는 바로 ‘소통 불능, 소통 부재’의 시대에 오로지 자기 목소리에만 귀 기울이는 사람들을 그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실제 ‘작가의 말’을 읽어보니, 최은옥 작가는 지하철을 탄 사람들 대다수가 오로지 스마트 폰과만 외로운 소통을 하는 모습이 가시처럼 가슴에 박혀서 괴로웠었답니다. 자기 말만 하고 남의 말을 자르는 사람들의 모습을 작가 스스로에게서도 발견하자, 소통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주는 동화를 쓰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 동화가 <칠판에 딱 붙은 아이들>이고요.
결국 아이들의 손을 칠판에서 해방시켜 준 것은 아이들 스스로였어요. 게임이나 스마트폰에 푹 빠져서 서로의 속내를 알려 하지도, 잘 알지도 못 했던 세 친구는 칠판에 손이 붙은 채로 진솔한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덩치 큰 민수는 아빠의 성화에 못 이겨 씨름을 했을 뿐 사실은 노래를 부르고 싶다 하고, 동훈이는 선물 세례를 퍼붓는 엄마보다는 같이 함께 해주는 엄마를 간절히 원한다고 마음을 털어놓습니다. 기웅이도 부부싸움이 잦은 엄마아빠 때문에 마음이 힘들다는 고백을 서로 나누는 사이, 자석처럼 칠판에 붙었던 손바닥이 저절로 떨어집니다. 친구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공감하는 사이 저절로 칠판의 저주에서 풀려난 것입니다. 보다 많은 이들이 스마트폰에서 해방되어 사람 대 사람의 소통을 통해 벽을 허물기 바라는 마음에서 최은옥 작가는 칠판의 마법주문을 다른 이들에게도 걸어 두었습니다. 아무쪼록 최은옥 작가가 꿈꾸듯, 사람들이 스마트폰 액정과의 고독한 일방통행을 하는 대신, 얼굴 대 얼굴, 목소리 대 목소리의 따뜻한 소통을 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