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용 도서를 읽으면서 이렇게 눈물을 흘려본적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큰아이는 책을 읽으면서 우는 엄마를 보면서 절절한 사랑이야기냐고 묻고, 작은 아이는 우는 책은 여자가 읽는 책이라 읽을수가 없다는 엉뚱한 주장을 내세운다. 내 주변의 어떠한 사건과도 연관되어지는 것 하나 없는 이야기에 동화되어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으니 역시 유은실 작가다. 몇 해전에『내 머리에 햇살 냄새』을 만났을때 작가의 언어 능력에 감탄을 금하지 못했던 적이 있었다. 어쩜 그렇게 딱 맞는 예쁜 단어를 사용할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마지막 이벤트』는 이 황홀하리 만치 가슴 찡한 이벤트 속에 담겨있는 내용이 느껴질때마다 숨겨둔 폭죽이 하나씩 터지면서 눈물샘도 함께 터지게 만들어 버린다.
일흔 아홉, 죽기 딱 좋은 나이를 외치는 영욱이의 할아버지는 비행 할아버지다. 젊은시절 자식들한테도 부인한테도 잘못한것이 너무 많아서 할아버지의 표현으로 할머니는 이혼하고 젊은 일본놈하고 일본으로 가셨고, 아무것도 남은것이 없어 영욱이네 집에 오셨단다. 모두들 할아버지에게 친절하게 대하지 않지만, 영욱이는 할아버지가 너무나 좋다. 무조건 영욱이 편을 들어주시는 할아버지를 왜 그렇게들 쌀쌀맞게 대하는지, 할아버지 냄새도(사실, 영욱이는 축농증이라 냄새를 못맡는다) 검버섯도 영욱이는 정말 좋다. 결혼해서 할아버지와 함께 살지 못한다는 것이 가장 큰 고민일 정도로 말이다. 영욱이의 할아버지, 표시한 옹(할아버지가 ‘옹’을 쓸때는 뭔가 좋다는 뜻이다)은 박카스를 좋아하시고, 예쁜 할머니들도 좋아하시고, 영욱이와 문자를 주고 받는 것도 좋아하시는 유쾌한 분이시다.
그뿐이 아니다. 할아버지의 휴대폰 1번은 영욱이다. 바탕화면도 영욱이의 독사진이다. 어느 가족도 영욱이를 이렇게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영욱이의 바탕화면도 할아버지다. 할아버지는 그동안 여러번 죽을 것 같다고 하셨고, 처음 죽을 것 같다고 하셨을 땐 식구들이 ‘다’ 할아버지 앞에서 눈물과 콧물을 흘리면서 울었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죽을 것 같다는 이야기는 양치기 소년의 허망한 울림이 되었고, 할아버지가 팬티에 오줌을 싸신 날 영욱이가 ‘다’들에게 전화를 걸었을때 할아버지께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박카스 세병을 마셨야 한다고 하시던 할아버지께 한병만 사다드린 영욱에게 온 할아버지의 문자는 ‘치사한 표영욱 ㅠ.ㅠ’. 그럴 수 있지 않는가? 할아버지 팬티 상자의 비밀도, 이벤트 상자의 비밀도 철저히 지키고 있는 영욱인데 말이다. ‘다’들에게 분명 전화를 했음에도 아빠도 엄마도, 고모도, 고모부도 오지 않은 그밤에 할아버지는 영욱이 손을 잡고 잠이 드셨고, 다음날 돌아가셨다. 잠이든 영욱이를 남겨두고 말이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나는 똥을 누네. 밥도 잘 먹고.’ (p.132)
죽기 딱 좋은 나이라고 하셨지만 이건 아니다. 밥도 먹고 똥도 누고 졸립기도 하는게 이해가 되지 않는데, 할아버지만 영욱이 곁에서 사라지셨다. 어린 시절부터 영욱이에게 할아버지의 이마는 푸른 하늘, 검버섯은 은하수 였고, 할아버지의 손짓을 알아듣는 것도 영욱이 뿐이었다. 아무도 할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음에도 할아버지의 죽음의 길앞에서는 서로의 이해타산을 하기 시작한다. 알아들을 수 없음에도 영욱인 할아버지의 가시는 길이 쓸쓸하고 아프다는걸 느끼게 된다. 어째서 할아버지가 그렇게 원하는 ‘이벤트’를 하려고 하지 않는걸까? 아니, 할아버지가 준비하신 특별한 ‘이벤트’는 어떤 것이기에 이렇게 소란이 일어나는 걸까?
할아버지는 소풍도 졸업도 이벤트라고 하셨기에, 죽음을 ‘마지막 이벤트’라고 하셨었다. 자식들에게 들키기 싫어 만들어 둔 팬티 상자 밑에 비밀스럽게 있던 이벤트 상자. 비밀의 이벤트 상자 속 내용물이 밝혀지면서 어른들은 남의 눈을 의식하고 영욱의 눈엔 유치하고 우스꽝스럽게만 느껴지기 시작한다. 어린 아이의 눈에 비추어진 장례 문화는 어쩜 우리가 그냥 지나쳐버린 현실인지도 모르겠다. 일반적인 용품으로 장례를 치르는 아빠, 부의를 조금만 하라는 고모부, 늘어져 선을 넘으면서 세워진 헌화. 영욱이가 할아버지를 그리는 마음은 곳곳에서 보여진다. 그리고 그 맘이 보여질때마다 가슴을 콕하고 찌른다. 아이의 마음이 나의 뭔가를 찌르고 있는데, 어떤것인지 찾아낼 수가 없다. 태어나 처음보는 할머니, 이야기도 하지 말라던 아빠가 할머니를 보고 펑펑 울고, 그렇게 찾지 않던 할아버지를 찾는 모습이 영욱에겐 이상하게 다가왔을지도 모르지만, 그러기에 가족일 것이다.
내 인생이 바뀔 정도로 커다란 문제가 생겨도 세상은 돌아간다. 있을 수도 없는 일인데도 나를 제외하고 모든것이 평온한것처럼 보인다. 아니, 어느순간 나 조차도 일상으로 돌아가 있다. 어린 영욱도 그럴 것이다. 그 시간이 조금 더 오래 걸릴수는 있지만, 평온의 시간은 분명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을 통해서 영욱인 자라날 것이다. 세상 모든것이 아픔없이 자라는 것은 없으니 말이다. 그 아픔의 크기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내게 오는 아픔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는 정답이 없다. 하지만 어떻게 견뎌내고 넘어서야 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크기는 변한다. 인생에 완벽한 내 편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참 행복했을테니 말이다. 영욱이도 비행 할아버지인 표시한 옹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