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 이 세상에 색깔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세상은 온통 회색빛이었죠.
회색이 아니면 검은색이나 흰색이었어요.”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됩니다.
48색 색연필을 처음 만났을 때의 놀라움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신비한 색의 향연이 매일 펼쳐지는 이 세계에서
회색 시대를 상상한다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서로 더 돋보이기 위한 색깔 경쟁에 빠져 빛공해까지 마다않는 요즘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인지 머릿속 상상과 그림책 속 그림이 만나는 지점에서 이야기는 더욱 생동감있게 펼쳐졌습니다.
흑백 TV 시절을 지내진 않았지만 마치 그런 느낌이겠죠. 회색 시대에 산다는 것은.
따사로운 햇빛을 느낄 수 있을까요?
비가 쏟아지기 직전의 흐린 날을 느낄 수 있을까요?
칙칙한 바깥 세상을 바꾸기 위한 마법사의 노력으로 ‘파랑’이 만들어지고
그렇게 파랑 시대가 시작됩니다.
파랑 시대의 슬픔과, 노랑 시대의 눈부심, 빨강 시대의 화.
완벽한 것처럼 보였지만 어느 것 하나 완벽하지 않았던 색깔 시대에서 우연히 발견하게 된 색의 비밀-색을 섞으면 새로운 색이 나온다는
지금은 너무나도 당연히 알고 있는 원리를
회색 시대, 파랑 시대, 노랑 시대, 빨강 시대를 살아본 사람들의 시행착오로 얻게 되었다는 것은
큰 노력없이 비교적 완벽한 현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척 상징적인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색이 갖는 의미가 상당히 주관적이기도 하지만 다수의 사람들에게 주는 이미지와 느낌으로 대입시켜 봄으로써
이야기의 내용이 더욱 극적으로 와닿기도 했습니다.
분홍공주인 아이도 한동안 모든 그림을 분홍으로만 칠해놓았던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예쁜 노랑도, 빨강도 한 가지 색으로만 가득 찼을 때 결코 예쁘지 않다는 것을 눈으로 바로 확인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백마디의 잔소리보다 훨씬 낫네요.
“이제 세상은 너무나 아름다워 더는 바꿀 필요가 없었답니다.”
그렇죠. 자연이 선물한 세상은 알록달록 참으로 예쁘기도 합니다.
하늘, 산, 나무, 바다, 풀, 과일..
자연색 그대로 무척 곱고 예쁜데 이 색을 가만 두고 지켜보면 안되는 것일까요.
밤이 되자 더욱 반짝 거리는 형형색색의 간판들은 그 예쁜 별빛, 달빛 마저 다 가려 버리고
오늘도 그 불빛이 보기 싫어 어김없이 커튼을 칩니다.
어쨌거나 여섯살 아이의 눈으로 읽은 <색깔 마법사>는 신기하고, 궁금하고, 끊임없이 상상하게 하고,
무엇보다도 얼른 물감놀이를 하고 싶게 만드는 재미난 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