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아동문학의 거장 버닝햄, 뇌스틀링거와의 인터뷰

[인터뷰]세계아동문학 거장 버닝햄과 뇌스틀링거
“아이가 말로 못하는 것 표현하게 돕고 싶어”

설령 당신이 아이를 키우지 않는다 해도 존 버닝햄과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의 작품을 단 한편이라도 읽게 된다면 아이들의 세계가 얼마나 진지하고
외로운지, 이를 탐구하는 동화가 문학의 얼마나 중요한 장르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두사람의 그림책들을 읽으며 전세계 아이들은 열광한다. 한국을 비롯한 전세계의 버닝햄 매니아들은 그가 발표한 50여권의 그림책을 책장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끌어안고 살고, 뇌스틀링거의 ‘프란츠 시리즈’는 유럽 아이들에게 ‘해리 포터’ 이상의 사랑을 받는다.

1936년생 동갑내기이기도 한 이들은 단순한 이야기꾼이 아니다. “어른과 동일한 권리를 지닌 어린이는 명령의 수용자가 아니라 대화의 파트너’라고 규정하는 뇌스틀링거, “아이들이 어른들보다 덜 지적인 것은 아니다. 경험이 부족할 뿐”이라고 단언한 버닝햄은 동화에 대한 낭만적이고도 상투적인 시각―어린이를 교훈과 계몽의 대상으로 삼는 태도―을 혁명적으로 뒤집어놓았다. 그들을 각각 유럽 현지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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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정신 연령은 다섯 살

런던 외곽 햄스테드 히스의 자택에서 만난 버닝햄은 오래돼 삐걱거리는 마루를 꾸부정한 걸음으로 오가며 직접 홍차를 끓여왔다. “걸음걸이가 존 패트릭 맥헤너시(그의 대표작 ‘지각대장 존’의 주인공)를 닮았다”고 농을 걸자, 그는 “나는 시간을 잘 지키는 아이였다”고 답했다. 열 군데 이상 학교를 옮겨다니다 결국은 썸머힐 스쿨(영국의 대표적인 대안학교)에 안착했던 괴짜소년. 공부보다는 숲과 동물에 미쳐 있던 버닝햄은 “2차 대전으로 1년간 학교에 안다녔을 때가 내겐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다.

―존, 셜리 등 당신의 어린 주인공들이 소심하고 다분히 냉소적인 것은 당신의 특별한 유년기와 관련 있는 듯하다.
“썸머힐 시절은 축복이었다. 수업을 억지로 들을 필요가 없었으므로 대부분의 시간을 미술실에서 빈둥거리며 보냈다. 자유로운 어린시절을 보냈다는
것은 그림책을 만들 수 있는 최고의 바탕이다.”

―교통 포스터 디자인 등 갖은 일들을 전전하다 1963년 데뷔작 ‘깃털없는 새 보르카’로 영국의 권위 있는 ‘케이트 그린어웨이 상’을
수상했다. 그림책 작가가 되려던 동기는 무엇이었나.
“그건 나의 정신연령(mental age)과 관계 있다. 사람들이 내게 몇살이냐고 물으면 나는 다섯 살이라고 답한다. 당신도 동화작가로
성공하려면 그 또래 아이들의 언어, 특히 농담을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웃음)”

―거칠게 그어댄 펜 선, 크레용부터 사진 콜라주에 이르기까지 활용한 풍부한 표현은 아이들을 매혹시킨다.
“어느 한가지 재료에 구속받으면 상상력도 무너지고 그림도 망가진다. 머리속에 완벽한 이야기가 구성되지 않으면 1년이 걸리더라도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당신의
삶과 작품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 있는가.
“10대 후반, 군대에 가지 않으려고 ‘프렌즈 앰뷸런스 유니트’라는 단체에 들어가 2년6개월간 숲과 슬럼가, 이태리 남부와 이스라엘을 떠돌며
막노동했던 적이 있다. 그때 만난 사람들, 들었던 이야기들은 나의 작업에 가장 큰 밑천이다.”

―그림책 ‘곰사냥을 떠나자’를 그린 헬렌 옥슨버리가 당신의 아내다. 유명한 부부 그림책 작가는 자녀들을 어떻게 키우는지 궁금하다.
“평범하게, 아니 무심하게 키웠다. 어느날 정신차려보니 죄다 그림을 그려대고 있었다.”(버닝햄의 세 남매 루시, 빌, 에밀리는 모두 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적어도 휴일과 사치품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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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어린시절을 미화하지 말라

오스트리아 작가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를 만난 곳은 독일 프랑크프루트 시내의 한 성당이었다. 돋보기 안경에 보풀이 살짝 인 주황색 가디건을 걸친 채 그는 성당 복도에 모여든 70여 명의 아이들에게 자신의 동화를 읽어주고 있었다. 낭독이 끝난 뒤 질문을 받았다. “당신의 가장 유명한 책은 뭔가요?” 한 사내아이의 이 대책없는 물음에 뇌스틀링거가 심각한 표정으로 응대했다. “아주 철학적인 질문이군!”

―아동문학가에게 주는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안데르센상에 이어 최근 6억원의 상금이 걸린 린드그렌 문학상을 첫수상했다.
“상이 좋은 건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와 내 작품에 대한 비평은 대부분 과장된 것이다.”

―사람들은 당신을 ‘제2의 아스트리드 린드그렌(말괄량이 삐삐의 저자)’이라고 부른다.
“둘다 언어를 중시한다는 점은 같다. 그러나 나는 린드그렌처럼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묘사하거나 아이들을 위로하려고 동화를 쓰진 않는다.
동화를 통해 세상에 대한 환상을 깨고 싶다.”

―시계공
아버지와 빈의 변두리에서 보낸 유년기는 작품에 어떤 영향을 줬는가.
“어린 시절의 추억은 대부분 잘못된 것들이다. 나는 과거의 기억을 소재삼아 글 쓰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유년기 영향이라면 나치와 2차
세계대전을 겪었다는 사실뿐이고, 그것으로써 세상 보는 눈을 갖게 됐다.”

―‘불처럼 빨간 머리 프리데리케’를 비롯한 초창기 작품들이 사회비판적·반교육적 관점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면, 프란츠 시리즈 이후의 것들은
아이들의 사소한 일상을 파고든다.
“70년대만 해도 나는 문학이 세상을 개선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문학은 독자들을 웃고 울릴 뿐, 세상을 바꿔놓지는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이들의 현실에 대한 통찰력을 높여주고 그들이 느끼는 불안감, 경험했지만 말로써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뿐이다.”

―아이를 키우는 젊은 부모들에게 조언해달라.
“나는 기본적으로 교육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것에 반대한다. 어른들의 꾸중과 칭찬을 통해 아이들은 깨닫지 않는다. 경험과 고통을 통해
스스로 배우고 자란다.”

(런던·프랑크프루트=김윤덕기자sion@chosun.com
)

▲ 뇌스틀링거의 글은…

국내에는 16종 정도의 작품이 번역돼 나왔다. ‘깡통소년’은 ‘오이대왕’과 함께 뇌스틀링거의 문제작으로 꼽힌다. 모범생을 만드는 공장에서 주문생산된 아이 콘라트와 아기가 없던 바톨로티 부인의 사랑을 통해 가족의 진정한 의미를 되짚어보게 하는 동화. ‘그 개가 간다’는 특히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학교교육을 코믹하게 풍자했다. 어리숙하고 외로운 아이들에게 특별한 애정을 쏟는다. 주제의 심각성에도 불구, 뇌스틀링거의 모든 작품엔 웃음이 깔려있다. 종류가 둘이다. 기성세대를 향한 냉소, 그리고 아이들의 숨 넘어가는 웃음소리.

▲ 버닝햄의 그림은…

다름의 존중을 강조한 ‘깃털없는 새 보르카’와 TV도 있고 장난감도 많지만 늘 혼자인 소녀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한 ‘알도’가 대표적인 작품. 못생기고 뚱뚱해서 버림받은 개 심프가 서커스 단원으로 화려하게 성공하는 과정을 그린 ‘대포알 심프’는 열등생들에게 짜릿한 희망을 심어준다. 버닝햄 자신은 “내가 죽으면 미스터 검피의 작가로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강물에서 한바탕 소동을 일으킨 동물과 아이들이 노을 지는 들판을 지나 집으로 돌아오는 ‘검피아저씨의 뱃놀이’ 마지막 장면은 그림책사에 명장면으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