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을 크고 바르게 키운 국어 학자 주시경

시리즈 새싹 인물전 51 | 이은정 | 그림 김혜리
연령 8세 이상 | 출판사 비룡소 | 출간일 2012년 9월 29일 | 정가 8,500원

[ 새싹 인물전 ] 주시경

 

초등학생이 처음 읽는 위인 이야기 [ 새싹 인물전 ]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동화 작가들과 화가들이 참여한 [새싹 인물전 ] 시르즈는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읽기 책 형식의

새로운 위인 동화입니다. 이 시르즈는 재미있는 글과 유머러스한 그림으로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 꿈 많은 아이들에게

올바른 역할 모델을 제시합니다.

 

 

한글을 크고 바르게 키운 국어 학자 주시경

 

황해도 봉산군 무릉골

한 서당에서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 나옵니다.

아이들은 무릉골의 덜렁봉을 보면 생각합니다. “역시 덜렁봉은 하늘보다 높은가봐 안 그러면 어떻게 구름이 덜렁봉에 걸렸있겠어 “

아이들 중 상호 하는 아이만 덜렁봉 산꼭대기에 올랐다

그런데 하늘을 덜렁봉 보다 까마득히 높은 곳에 있었다. 지금 올라 온 것 보다 몇배는 더 높이

” 내가 잘못 알고 있었구나 하늘이 덜렁봉에 걸려 있는게 아니였어 내눈에 그렇게 보였을 뿐이지 “

만약 지금 덜렁봉에 오르지 않았다면 눈에 보이는것만 믿고 있을 것이다.

세상이 이렇게 큰지를 몰랐을 것이다.

상호는 국어 학자 주시경 선생의 어릴때 이름이다.

 

주시경은 어려서 부터 훈장님이신 아버지 밑에서 한문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그는 처음부터 우리말로 하면 바로 알아 들을 말들을 어려운 한자로 공부 하는 것이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훈민정음 소리 나는데로 글자가 되니 쉽고 간단해 누구나 빨리 배울 수 있는데 말이다.

그는 한자로 적을 수 없는 소리들을 훈민정음으로 적어 보았다.

훈민정음 한자와 달리 어떤 소리도 글자로 적을 수 있다. 주시경은 훈민정음에 빠져 들게 되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훈민정음을 얕잡아 보고 점잖지 못한 글자라는 뜻으로 언문이라고 부르며 무시했다.

주시경이 보기엔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사람에 필요한 글자는 한문이 아니라 훈민정음이였다.

 

주시경은은 열아홉 살이 되던 해 배제 학당에 입학을 했다.

그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마음 놓고 공부만 할 수 가 없었다.

수업이 끝나며 배제 학당 인쇄소에서 일을 하면 생활에 필요한 돈을 마련해야 했다.

집에 돌아 올 때쯤이면 몹시 피곤했지만 주시경은 쉬지 않고 우리글을 연구 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사람들이 두루 볼만 한 우리글 문법책이 없었다.

그는 사람들이 쉽게 알아 볼 수 있는 우리글 문법책을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도움이 될만한 자료가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 다녔다.

우리글 연구는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힘든 연구였지만 주시경은 연구를 거듭 할 수록 우리말과 글이 매우 훌륭하고 아름다답는 걸 깨달았다.

 

서재필은 신문을 펴낼려고 했다.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의 힘에 휘둘리지 않고 혼자 힘으로 바로 서기를 바랐기 때문에 신문 이름도 독립을 바라는 뜻에서

독립신문이라고 불렀다.

주시경도 <독립신문>을 만드는데 힘을 보태게 되었다.

혼자서 우리글을 연구 한다는 소식을 듣고 서재필이 주시경을 찾아 온 것이다.

<독립신문>은 한문이 아닌 우리글로 만들기 때문에 주시경이 틀린 글자를 바로 잡아 교정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1896년 4우러 7일 드디어 우리나라 최초의 우리글 신문이 <독립신문>이 나왔다.

<독립신문>은 나라 안팎의 소식은 물론이고 정부 대신들이 잘못한 점을 꼬집는 기사도 실었다.

사람들은 신문 기사를 읽고서 나라 사정을 더 잘알 게 되었고 대신들의 잘못을 목소리 높여 비판하기도 했다.

날이 갈수록 <독립신문>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신문이 되었다.

주시경은 <독립신문>을 통해 세삼 우리글의 힘을 느꼈다.

<독립신문>이 한문으로 쓰였다면 한문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은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지나쳤을 테니 말일다.

정부의 대신들은 서재필을 다시 미국으로 보낼려고 했다. 자신들의 잘못이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주시경도 억울하게 감옥게 갇히게 되었지만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풀려 나게 되었다.

서재필은 미국으로 떠나야 했고 주시경은 서재필의 빈자릴 채우기 위해 더 열심히 <독립신문>을 만들었다.

 

1898년 12월 31일 주시경은 그토록 바라던 우리글 문법 책 <대한국어문법>의 첫 번째 원고를 완성했다.

이책에서 주시경은 우리말 자음과 모음의 특징을 밝히고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지 정리했다.

또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과정을 실어 우리글에 얼마나 큰 뜻이 있는지도 알렸다.

배제학당을 졸업한 뒤 주시경은 <대한국어문법>을 교과서 삼아 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학교가 쉬는 날에도 일요학교와 야학을 열어 학교에 목 다니는 사람들에게 국어를 가르쳤다

상동청년학원에 국어 강습소를 열어 국어 선생님을 꿈꾸는 청년들도 가르쳤다.

신문과 잡지 에 우리말과 우리글을 쓰는 것이 왜 중요한지 알리는 글도 실었다.

정부에서도 국어 교육의 필요함을 깨닫고 국문 연구소를 만들었다.

주시경은 국문 연구소 연구원이 되어 우리글 맞춤법과 발음을 연구 했다.

 

1910년 8월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권리인 주권을 일본에 빼앗긴 것이다.

강제로 우리나라를 빼앗은 일본은 학교에서 우리말과 우리 역사를 가르치지 못하게 했다.

우리말과 우리글을 국어 라고 부를수도 없었다.

주시경은 이럴때일수록 우리는 우리말과 우리글을 잘 지켜야 하고 나라사랑으느 나라말을 아끼는데서 비롯된다고 하였다.

일본의 지배를 받는 동안 주시경은 우리말과 글을 더욱 더 열심히 연구했다

 

주시경은 훈민정음의 이름도 우림라로 짓기 위해 고민했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좋은 뜻이였지만 한문 이름이였다.

주시경은 오랜 고민끝에 ‘ 하나이자 크고 바른 글 ‘ 이라는 뜻의 ‘한글 ‘ 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주시경은 한글 문법을 정리한 책들도 꾸준히 고쳐 썼다.

1906년에는 <대한국어문법>의 배용을 고치고 다듬어 펴냈고 1910년에는 <국어문법>을 다시 정리했고 <말의소리>라는 책도 썼다.

그리고 우리나라 첫번째 국어 사전이 ‘말모이’를 만들기 시작했다.

 

주시경은 서른아홉의 나이로 아쉽게 삶을 마치고 말았다.

주시경은 평생울 오로지 우리말과 우리글을 사랑하는데 바쳤다.

한글의 큰 뜻이 바로 설 수 있도록 든든한 주춧돌이 되어 주었다.

주시경의 국어 문법 연구는 한글이 더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은 누구나 우리말과 우리글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 .

그 이유는 한글을 아끼고 사랑한 많은 이들의 노력 덕분이다.

이제 한글은 가장 아름답고 과학적인 글자로 널리 인정을 받고 있다.